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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은 Jun 08. 2019

010  비 갠 날의 시라즈

킬리빙빙 시라즈 (Killibibin Shiraz, 2013)

 

  미세먼지로 뒤덮여 있던 봄날이 거센 비바람에 씻겨 내려간 하루였습니다. 이태원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서울 하늘의 저녁노을은, 누가 일부러 그려낸 예쁜 그림 같았지요. 상쾌하고 보드라움. 더운 여름이 시작되기 전 계절의 애피타이저 같은 6월의 어느 날. 호주산 와인, 킬리빙빙 시라즈 Killibinbin Sneaky Shiraz (Langhorne Creek) 2013과 함께 하였습니다.    



  아, 이게 와인병에 붙어 있을 디자인이 아닐 것 같은데. 참, 예사롭지 않습니다. 게다가 스니키(Sneaky) 라니요. '교활한' 혹은 '은밀한'의 의미를 담은 채, 마치 1960년대 미국 탐정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고전적이고 섹시한 느낌으로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약간 또라이(?) 같은 와인 회사(https://www.brothersinarms.com.au)의 킬리빙빙 Killibinbin 시리즈는 그 이름들이 죄다 예사롭지 않습니다.


  스크림 시라즈 (Scream Shiraz), 스케어디 캣(Scaredy Cat), 유혹(Seduction) 그리고 비밀(Secrets)까지. 만들어내는 와인마다 그럴싸한 이름을 붙이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영화 포스터 같은 디자인으로 확실히 보는 이들의 눈도장을 찍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맛이 떨어지는 와이너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무난하고 이른바 '가성비' 좋은 킬리빙빙 시리즈는, 부담 없이 즐기기 좋은 라인업이죠. 그중에서 스니키 시라즈는 분명히 '팜므 파탈' 같은 느낌의 한 잔입니다. 이 한잔으로 오늘 밤의 파멸이 시작되더라도, 거부할 수 없을 것 같은 묘한 유혹의 시작점.





  '시라즈' 혹은 '시라'라고도 부르는 이 품종을 저는 가장 좋아합니다. 묵직하면서도 진한 맛의 와인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같은 품종이라도 호주산 시라즈와 칠레산 시라즈의 맛이 좀 다르더라고요. 빈티지나 와이너리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호주산은 좀 더 가볍고 과일향이 강한 듯하고, 칠레산은 더 '찐한' 맛 같아요. 비 오는 날에는 '찐한' 시라즈가 좋고, 비 개인 저녁에는 조금 발랄해진 호주산 시라즈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킬리빙빙 스니키 시라즈라면, 모든 것이 다 젖었다가 개운해지는 날의 상쾌함을 더해 줄 좋은 한 잔이랍니다.   


  제가 '시라즈'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것이 제가 처음으로 맛본 제대로 된 와인이 '시라즈'라서 일종의 심리적 '각인 효과'가 생긴 게 아닐까 해요.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와인은 좀 생소한 술이었죠. 제과점에서 같이 팔던 '마주앙' 시리즈가 있었지만 설탕을 많이 넣은 샴페인(?)스러운 알코올이었고, 미국에서 학교 다닐 때 기숙사 친구들과 먹던 싸구려 와인은 떫떠름하고 딱히 내 스타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 어쩌다 들어간 첫 직장이 신문사였는데, 당시에 생소했던 와인 산업에 대한 취재가 막내였던 저한테 떨어지는 바람에 부랴부랴 와인에 대한 자료를 뒤적이고 주류업체 사장님들을 만나서 한잔 두 잔 하기 시작하면서 '입이 열리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역시 저는 와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정이 붙지 않았답니다. 특히, 당시에 와인 마케팅은 '프랑스산'에 집중되어 있었고 (뭔가 와인 하면 프랑스라는 느낌적인 느낌 때문에), 심지어 '보졸레 누보' 같은 (나는 정말 왜 이걸 먹는지 모를 만큼 맛없게 느껴지는) 햇와인에 대한 기사를 쓰다가 지루해지기 까지 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 전자회사 홍보실과 호텔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와인을 한잔 주시더라고요. 그리고 무심코 받아넘긴 한 잔. 저는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대화의 내용은 안중에도 없었고, 도대체 이 와인은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식사시간을 다 채워버렸죠.


  홍보실과의 일정을 마치고, 식당을 나서면서 서빙을 해주시던 여직원을 따라가서 그 와인의 정체를 물어보고 왔어요. 그 와인의 정체는 다음에 밝혀 드립니다. 다만, 그 와인은 100% 칠레산 시라즈였다는 힌트 만 남겨 드려요. 그 후, 저는 시라즈 '만' 먹는 사람이 되어버렸고요.   


  역시, 와인은 시라즈입니다.           








  나는 왜 늘 '각인'이 강한 사람인가, 스스로 궁금했던 적이 많습니다. 사소함을 잘 잊지 못하는 데다가, 특히 처음 느낀 어떤 무엇에 대하여, 나중에 떨치기 힘들 만큼 그 느낌이 그대로 굳어져 버리는 사람이거든요. 누군가와의 첫 만남을, 첫인상을, 처음의 무엇을 잘 기억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축복이기도 하지만, 좀 다르게 보면 그런 재주(?)가 참 저주스럽게 느껴지는 날들도 많았습니다.


  남들보다 좀 예민하다는 것, 기억을 잘한다는 것. 그런 것들 덕분에 남들보다 조금 공부하고도 이런저런 시험을 잘 보는 장점도 있었지만, 마음속은 항상 이런저런 기억들이 지워지지 않아서 요동치는 풍랑의 한 복판과도 같았고, 머릿속에는 이제는 잊어도 좋을 혹은 잊어야 괜찮아질 장면들과 사람들이 꾸역꾸역 주저앉아 있기도 합니다.   


  새로운 것을 찾아서 소나기처럼 퍼부어도, 이상하게 옛 기억들은 다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어떤 골목길을 걷다가, 이 길을 함께 걸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하나 다 생각나서, 문득 고개를 돌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곤 합니다. 그리고 그런 오래된 기억은, 나와 함께 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는 다 잊은 지 이미 한참일텐데. 오롯이 나의 몫으로 만 남아있겠지요.


  나는 매일매일 헤매이고 돌고 돌아, 길 잃은 아이처럼 두리번거리며 늘 그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누군들 나를 잊으셔도 감히 탓하지 않을게요.   


  늘, 그래 왔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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