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wa (CS 2018, Chile)
정말 딱 '한 잔'하고 산책하기 좋은 '한 잔'을 고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더군요. 알코올의 도수로 만 생각하면 맥주가 좋겠지만, 자꾸 화장실이 가고 싶어 질지도 모르는 일이라서요. 소주나 위스키 한 잔도 괜찮겠습니다만, 한 동안 걸어야 한다면, 입이 마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아, 역시 와인입니다. 그리고 가장 무난하고 무겁지 않은 주스 한잔처럼 부담 없는 테이블 와인이요.
오늘은 지난 오월의 마지막 밤, 종묘 담장을 따라 걷다가 한 모금하면서 만났던 칠레산 와인 트레와 카베르네 쇼비뇽 (Trewa Cabernet Sauvignon, 2018)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트레와는 사실, 같은 품종의 그랑 리제르바 (Gran Reserve Cabernet Sauvignon)가 많이 알려져 있고, 등급이 다르니 그게 훨씬 좋습니다. 호텔 식당의 와인 리스트에서도 본 것 같으니까, 제가 좋아하는 칠레 와인들이 그렇듯이, '가성비' 괜찮은 와인 중에 하나지요. 하지만, 오늘 말씀드릴 2018년 산은 트레와의 '보졸레 누보' 같은 막내랍니다. 맛이 가볍고, 숙성된 묵직함이 없고 신맛이 강하지요.
이미 저의 매거진에서 소개해드린 칠레산 와인 Perez Cruz (#002 '꽃의 눈물' 참고)의 경우에는, 카베르네 쇼비뇽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시라(혹은 시라즈라고도 부르는) 품종의 묵직함과 깊이가 느껴지는데, 작년에 태어난 막내 트레와는 보졸레 누보에 신 맛이 나는 산지오베제를 몇 방울 섞은 느낌이죠. 물론, 입맛은 주관적이니까 다르게 느끼실 수 있겠죠. 이건 순전히 저의 혀피셜입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좋은 자리에서 분위기 잡으며 '앉아서 마실' 만한 술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술은 저마다의 쓰임이 있다는 것이 저의 오래된 생각입니다. 세상에 버릴 술은 없답니다! 이 막내 트레와는 글라스를 들고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의 바람을 맞으며, 한 모금을 털어 넣고 늦은 밤 길을 나서기에 딱 좋은, 부담 없이 신선한 한 잔 이랍니다. 무겁지 않아서, 한 잔으로 취기가 오르거나 발걸음이 느려지도 않고, 카베르네 쇼비뇽 치고 신 맛이 강한 편이라, 계속 침이 넘어와서(?) 한잔을 하고 길을 걸어도 목이 마르지 않았어요. (아! 그래. 너는, 등산길에 싸가던 오이 조각 같은 존재였구나) 늦은 밤의 산책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이 한잔이.
세상이 죄다 무겁고 드라이한 것들로 만 채워져 있다면, 어디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하나도 가벼운 것이 없고 쉬운 일이 하나 없지만, 우리의 삶을 간신히 지탱해주는 것들 중에는 먼지처럼 가벼운 것들, 얼핏 보아 쓸데없어 보이는 것이 제대로 한몫을 해내고 있겠죠. 친구들과의 실없는 농담,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내질러버린 학창 시절의 유행하던 욕 같은 유행어, 어디에 보여줄 것은 아니지만 다이어리 한 귀퉁이에 적어둔 푸념 섞인 나의 메모... 그런 싸구려 테이블 와인 같은 것들로 진지한 정찬들 사이의, 진지 빠는 인생사의 버거운 피로를 틈틈을 채우며,
오늘도 나는 그리고 당신은, 우리는
하루를, 한 달을, 일 년을 그리고 일생을 견디어 냅니다.
종묘 담벼락을 따라 굽이치는 '순라길'에 아기자기하게 자리 잡은 가게에서 이렇게 한 잔을 하고, 또 길을 걷다가 다른 곳에서 정말 또 '딱 한잔'을 하고, 그렇게 이곳저곳을 걷다 보니 빠르던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어요. 그러다가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 어느 고요한 달동네 높은 곳에 올라,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볼 무렵에는 등에서 김이 모락거리는 기분이었어요.
늦은 밤에, 느린 걸음은 하루 종일 거침없이 흘러가던 나의 생각을 붙잡아 줍니다. 비로소 나의 생각도 아득하게 느려집니다. 나는, 왜... 그리 좋은 머리도 아니면서, 그리 잘... 생각하는 것도 아니면서, 항상 성격이 급하고 마음만 바빠서 하루 종일 일을 다 그르쳤을까요. '욱'해서 여기저기를 들쑤셔 놓다가, 이렇게 느려진 생각의 시간이 찾아오고 나서야, 어지럽던 시냇물을 겨우 가라 앉히듯이.
맞아요. 나에게는 너무 많은 것들 쌓여 있었군요. 산골짜기에서부터 굽이쳐 흐르고 이리저리 흙탕물로 치이다가, 넓은 물을 만나는 하류에 와서야, 나는 이것저것 다 토해놓게 되는군요. 늦은 밤의 느린 생각 덕분에, 아직도 소리 없이 엉엉 울고 있는 것 같은, 철없는 내 자신의 어깨를 다독여봅니다. 머언 서울의 불빛과 함께 하는 늦은 밤의 산책이,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귓속의 자장가처럼 느껴집니다. 뭐, 이게 다 '술김'일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렇게 생각이 다 느려지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다 잠이 들면, 하나의 생각 만, 남을지도 모르겠어요.
그게 당신이라면, 참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