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책을 읽을 때엔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로 내 귓가는 늘 시끄러웠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 ‘뇌’, ‘나무’, 김진명 작가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최인호 작가의 ‘상도’, 그리고 총 10권으로 편집된 셜록홈스 시리즈까지 인물들의 대화를 들으며 책을 읽어나갔다.
만화책을 읽어도 마찬가지였다. 슬램덩크, 더파이터, 닥터 노구치 등 모든 만화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슬램덩크는 나중에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봤을 때 내 상상 속의 목소리와 성우가 꽤나 달라서 참 생소했다.
스무 살이 되면서부터 책과 다소 멀어지며 주인공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제는 아무리 노력해도 더 이상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다행히 글이 그려내는 이미지는 책을 덮은 뒤에도 잔상이 남는다.
오랜만에 여운과 잔상을 길게 남긴 책은 나이키 창업자 필 나이츠의 자서전 ‘슈독’이었다. 어느 날은 출근하다 말고 회사 1층 카페에 앉아 한 챕터가 끝날 때까지 마저 읽고 엘리베이터를 탔을 정도로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숏폼보다 더 정신없이 몰입한 건 오랜만이었다. 그가 안갯속을 달리며 사색하는 장면, 하와이에서 서핑을 하는 장면, 디자이너와 ‘스우시’ 로고를 그려낸 장면, ‘오리건의 남자’들이 호프집에서 시끄럽게 웃는 장면들이 눈에 선하다. 실제로 본 적도 없고 실제와도 다르겠지만 말이다.
요즘 첫째 아들이 그리스로마신화에 빠져있다. 유튜브에서 영상으로 보다가 스무 권짜리 만화전집으로 넘어왔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잠자리에 들 때에도 놓지 않는다. 이 녀석에게도 그리스 신들의 목소리가 들린다면 얼마나 재밌을까 상상한다. 그리고 상상의 청각이 차츰 독서의 재미로 번져나갔으면 하는 기대도 내심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