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그 빛을 발하는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했더라도 사람이 붐비는 지하철에 몸을 싣는 일은 여간 곤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감미로운 향으로 내 몸을 감싼다 한들 타인의 지독한 체취에 서로 엉키다 보면 활기차고 생동감 넘치던 향은 이내 꼬릿꼬릿해지고 만다. 여름은 여름대로 서로의 살결이 닿지 않으려 신경이 곤두서고, 겨울은 겨울대로 내 옷의 무게에 남들의 무게와 뜨거운 콧바람까지 보태지니 하루가 곱절로 무겁게 느껴지곤 한다.
특히나 트래픽이 많은 주요 역들에서 환승을 할라치면 아무리 올드머니룩, 홍대 파티룩을 착장 했다 하더라도 그 우아함과 황홀함을 유지하며 내리긴 절대 불가능하다. 본 적 없는 이들의 등살에 떠밀려 이리저리 휘청하다가 지하철에서 볼품없이 튕겨져 나오기 일쑤기에, '나 오늘 좀 기품 있게 행동하고 싶은데?'라고 마음을 먹어도 뜻대로 이룰 수 없는 것이다. 피곤에 찌든 출퇴근길을 견뎌내고 나면, 지하철 밖에 펼쳐진 시간을 활력 있게 시작할 힘은 점점이 사그라들고 만다. 아이고 아까운 내 시간. 그렇다고 소중한 시간을 지키기 위해 일을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자차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 또한 꽉 막힌 도로에 갇혀 엉덩이가 노다지 퍼지게 내버려 둘 수만은 없지 않은가.
지하철 안에서 유튜브도 인스타도 이리저리 뒤적거려 봐도 볼거리가 더 이상 없을 때, 내 앞에 놓인 사람들의 발을 쳐다본다. 신경이 곤두서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면 쌈박질이 날 수 있으니 눈 맞춤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그렇기에 가장 안전하게 눈길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은 바로 가장 낮은 곳, 발이다. 각양각색의 신발, 닳음의 정도, 관리여부에 따라 '이 사람은 키치한 걸 좋아하겠구나, 많이 돌아다니는 사람인가 보다, 저 신발은 이쁘네 어디 브랜드지? 물어볼까?, 앗 실밥 터졌다!, 다리 꼬려다 저 파츠에 긁히면 아프겠다 그래도 이쁘긴 하네, 저렇게 스트랩이 많은 신발을 신어도 발이 안 붓네(하지부종을 달고 사는 사람으로서 붓기 없이 매끈한 발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 없는 거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주변 환경에 조금은 너그러워진다. 신경이 덜 쓰인다는 말이 좀 더 맞을지 모르겠다.
관심 없다는 듯 고요하게 나의 은밀한 시선을 받은 발들이 예고 없이 연주를 시작하는 순간이 있으니 바로 9호선 열차로 환승하러 가는 길목에서다. 두두두두 우렁찬 소리를 내며 발맞춰 뛰고, 짝짝짝 경쾌한 박자에 맞춰 에스컬레이터를 걸어내려간다. 다급한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을 배려해 살며시 스-윽 옆으로 비켜주는 이들까지 합세해 약 1분 남짓한 타악기의 변주를 맛보게 된다.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무슨 수를 썼는지 일제히 같은 리듬을 만들어 내는 소리를 알아차리면, 더 이상 성가신 소음이 아닌 찰나의 재미가 되곤 한다.
이 잔잔한 재미를 좀 더 확장하려면, 영화 OST를 주제로 한 오케스트라 음악을 곁들이는 것이다. 꼭 오케스트라 버전이어야 한다. 그럼 고루한 지하철 안에서의 시간이 좀 더 풍성해진다. 환승열차를 향한 모두의 발걸음에 토르의 'Dark world'를 입히면 지각을 피하기 위한 서두름이 아닌, 지구를 지키기 위한 용사의 웅장함으로 다가온다.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사람들로 가득한 열차 안에 겨울왕국의 'Show yourself'가 울려 퍼지면 각자 아렌델 왕국의 백성이 되고 노덜드라 부족의 일원이 되어 모두의 안녕을 기원하는 결연함 드러내다 이네 환희가 가득 차오르는 것이다.
마치 내가 오케스트라를 자주 듣는 사람 마냥 젠체한 것 같지만, 이는 아직 탐험되지 않은 나의 욕망을 발 빠르게 파악하고 발견해 낸 유튜브의 알고리즘 덕분임을 밝힌다. 그들의 선견지명으로 우연히 클릭한 또모 오케스트라 공연 영상 덕분에, 짜치고 피로한 출퇴근 길이 조금은 기다려졌다(어차피 나는 그 길을 나서야 하는 사람이기에 이왕이면 좋게 생각해 보자 이거다. 물론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최고다). 오늘의 발걸음들은 어떤 리듬을 만들어 낼까, 무표정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그려질까. 기대하는 즐거움 말이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클래식 오케스트라 음악으로는 아직 이런 상상하는 재미를 찾지 못했다, 음악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기엔 식견이 없기 때문에 이미 이야기 배경을 알고 있는 영화 OST가 더 친근한 것일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