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大雪)을 목전에 두고
지난가을은 꽤나 즐겁고 고통스러웠다.
아픈 아이, 일 폭탄, 틀어진 동료애의 서사들이 한데 뒤엉켜 지화차 파티를 열었다. 그러는 와중에 잡힌 해외 출장까지. 내심 출산 이후로 처음 갖는 혼자만의 긴 시간이라 은근 기대했으나 혼자 할 줄 아는 것이라곤 밥 먹는 거밖에 없는 상사를 뫼시고 다니느라 정신만 탈탈 털려 돌아왔다. 그럼에도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글을 쓰고, 생애 첫 동화를 완성시키고, 독서모임의 책들까지 도장 깨기 하듯 읽어 나갔다.
그렇게 11월의 문턱에 들어서고 나니, 열심히 돌아가던 에너지가 갑자기 멈춘 기분이 들었다. 너무 과하게 내달렸나? 그래서 갑자기 이렇게 번아웃 같은 증상이 나타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고 싶은 마음도, 어떤 글을 써야 할지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몸의 피로도도 평소보다 더 높게 느껴졌었다. 시차 핑계를 대기엔 충분한 수면 시간이 있었기에 꼭 그런 것만 같진 않았다.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는 느낌이었다. 내 몸이.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운동을 멈췄고, 글쓰기를 멈췄다. 나와 다짐한 100일 챌린지 같은 것들을 모두 내려놓았다. 그럼에도 마음 깊은 구석에서 죄책감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 때면, 책을 집어 들어 읽어 내려갔다. 책을 읽는 걸로 나한테 느껴지는 모든 죄책감을 상쇄시키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때때로 이렇게까지 글을 안 써도 돼? 글력을 키운댔잖나? 그러려면 잘 쓰진 않아도 매일 쓰는 노력은 해야 할 텐데? 자문의 나날이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하얀 창을 띄워놓고, 키보드에 손을 올려보았지만 도저히 한 문장조차 제대로 끝맺음을 할 수 없었다. 최근의 나는 그런 상태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나는 매일 저녁을 맥주 나발을 불며 낭창낭창 시간을 흘러 보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을 흐르고 달력을 보니 대설이 벌써 코 앞에 다가왔다. 그 간의 노력이, 얕게나마 만들었던 나의 글력, 근력 루틴이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질까 싶은 두려움도 함께 엄습해 왔다.
억지라도 움직여볼까 싶은 마음에 운동 예약 달력을 가만히 살펴보는데 운톡에 예약 내역이 떠있는 걸 보고 의아했다. 이게 언제 예약된 거지? 시스템에 오류가 생긴 건 아닐까? 싶어 계속 들여다보는데, 문득 지난 금요일에 술기운으로 마구잡이로 예약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실 월요일 하루도 더 미루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취소할 수 없는 감사한 시스템 덕분에 그리고 과거에 의욕이 넘쳤던 내 덕분에 레깅스를 꾸역꾸역 챙겨 입고 센터로 향했다.
한 달여 만에 운동한 탓에 모든 동작이 수월하진 않았지만 막상 하고 나니 기분 좋은 개운함이 느껴졌다. 그래, 현재의 내가 못해도 과거의 내가 잘 잡아주면 되지. 그렇게 서로 끌어주고 잡아주면 미래의 나는 조금 더 나아지겠지.
조금 내려 놓는 마음으로 다시 하나하나 건드려 볼 생각이다. 그러다 안되면 또 다시 일어나서 걸어 나가면 되니까. 다만, 나의 방향성만은 잊지 않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해볼 뿐이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썼다. 마침내 한 페이지를 정복했으니, 오늘 난 그걸로 충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