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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인 이세린 Oct 11. 2021

퇴사 경위보고서

프로N잡러, 당구장 지기가 되다


도쿄는 긴급사태 선언, 나는 퇴사선언.

    2021년의 도쿄는 한 달짜리 수도권 긴급사태 기간을 연장하고 또 연장하는, 말 그대로 연장의 연속이었다. 한인타운에 있는 거의 모든 가게들이 휴업을 하거나, 저녁 8시에 문을 닫았다. 다음 달엔 상황이 좋아지겠지, 다시 그 다음 달이 되면 나아지겠지, 되뇌이기를 열 달. 고문 중의 제일은 희망이라. 인생은 뭐랄까, 기력과 무기력의 진자운동이 아닐까. 뭐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 노잼의 나날이었다.



이건 다 코로나 때문이 아닐까

    나의 직장도 예외는 없다. 근무시간이 줄고 월급의 80프로에 해당하는 급여를 받고 나니, 하필 이 시국에 하고 싶은 걸 찾아 떠난다며 1년 전 호기롭게 퇴사한 나 자신이 어리석었나 하고 손톱만큼의 후회를 한다. 친구의 소개로 맡아하던 외주 번역일을 시간과 마음이 여유롭지 않다는 이유로 그만둬버린 것도, 섣부른 행동이었나 아차 싶다. 직장에 다닐 땐 적어도 매달 꼬박꼬박 100프로의 월급이 통장에 꽂혔고, 용돈벌이 부수입도 참 짭짤했는데. 지금 와서야 아쉽다. 이쯤 되면, 사람이 참 간사한 건지 내가 철이 없는 건지 잘 모르겠다며 괜히 코로나 탓을 해본다.


    사실 이 모든 건, 코로나 때문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일이었다. 대학시절 내내 일하던 서비스직을 관두고 엄마의 바람, 나의 바람대로 ‘보통의 회사’에 취직을 했다. 워라밸을 소중히 하는 스타트업 회사의 물류부. 그곳에서 나는 재고를 관리하고 거래처 납품을 책임지는 소위, 창고지기였다. 완전히 적성에 안 맞았다고는 못하겠다. 내가 주체가 되어 관리 시스템을 잡아가는 것이 조금 뿌듯하기도 했고, 살인적인 납품 스케줄을 맞추는 데에 약간의 쾌감마저 느꼈으니까. 변탠가? 아무튼. 아무 날도 아닌 어느 아침, 눈을 떴는데 문득 이 생각이 들었다. 아, 출근하기 싫어. 퇴사를 하자.



회사란 원래 항상 다니기 싫은거다.

   아무리 그래도, 뭣 같아서 때려친다고 말할 순 없는 거니까. 수많은 이유 중 퇴사를 결심하게 만든 명분 하나는, 회사 창고의 이전계획이었다. 어쩜 공교롭기도 하지. 나는 왕복 3시간을 출퇴근 만원 전철에 낑긴 채로 돈 벌러 다닐 자신이 없었다. 솔직히 얘기하면 그렇게까지 나 자신을 갈아가면서 일하고 싶지 않았고, 그 정도로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좀 더 솔직해지자면, ‘그저 그런 회사원’이 될까 봐 무서워졌다. ‘보통의 회사’에서 ‘보통의 회사원’으로 산다는 게, 직장이라는 신성한 토템 앞에 가마니처럼 가만히 서있는 NPC 같이 느껴졌달까. 그래, 구구절절한 퇴사의 사유는 다 집어치우자. 뭣 같아서 때려친거다. 내가 아는 한 ‘왕복 3시간’은 가장 말하기 편하고, 퇴사하기 딱 좋은 핑계임에 틀림없다. 나는 상사와 동료들의 아쉬움 섞인 응원을 뒤로한 채, 참으로 홀가분하게 입사 11개월 만에 퇴사를 했다.


    아니, 그렇다고 무작정 관둔 건 아니고. 일복이 터졌고, 기회가 왔고, 잡았다. 쓰리잡을 하던 때였다. 평일엔 칼퇴 후에 번역일을 하고, 주말엔 대학시절 때부터 아르바이트하던 고깃집에서 삼겹살을 구웠다. 딱히 갚아야 할 빚이 있다거나, 급전이 필요한 건 아니다. 하고 싶었던 새로운 일과 오래 해 왔던 익숙한 일을 하면서, 무료한 일상에 자극을 주었다. 쓰리잡 중 어느 하나가 질리도록 재미없어지면, 미련 없이 그만둬야지. 그런다고 내 몸뚱아리 하나 못 맥여 살릴까. 그 해 여름, 주말에 삼겹살을 굽고 있는 내게 땡초*가 인생 계획을 물었다.



-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돼?

-  음… 글쎄. 사실 잘 모르겠어요.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가 않아요. 생각해보니까 단 한 번도 계획대로 된 적이 없어요. 제 인생에 가장 큰 변수는 제 마음인데, 그게 또 언제 바뀔지는 모르는 거니까. 지금 생각 같아선 앞으로 딱 1년 동안만 프리타*로 살다가 한국 들어가고 싶은데, 또 모르죠 뭐.

-  1년?

-   네. 비자가 딱 1년 남아서. 그냥 한국 들어가려구요. 엄마도 보고싶고.

-   너 … 당구 좀 치냐?




      2020년 가을, 그렇게 나는 ‘아다리가 맞아서’ 멀쩡하게 자알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웠다. 땡초는 당구장을 차렸고, 나는 다시 취직했다. 은퇴 후 당구장을 차리는 사장님은 있어도, 퇴사하고 당구장 직원이 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다만. 아무렴 어때,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자. 아 맞다 이거, 엄마한텐 당분간 비밀이다.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도전은 언제나 초심자의 행운으로 시작해, 반드시 가혹한 시험으로 끝을 맺는다’ -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땡초 : 점장(店長)의 일본어 발음인 ‘텐쵸’를 은어처럼 부르는 내 언어. 이유는 쏘 심플. 텐쵸는 정없고 오빠는 간지럽다.

*프리타(フリーター):프리 아르바이터의 준말. 대학 졸업 후 정규직에 있지 않고 아르바이트로 사는 자유직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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