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양식이나 법칙, 탬플릿을 찾으려 하지 마세요
"A님, 최근 경쟁사 동향 정리해주세요~ 본부장님 보고할 때 같이 파일 첨부할 수 있게요."
"..!!! 네!!"
대답과 동시에 모니터 앞에 숨어 머리를 싸맨다. 보고서, 기획서, 제안서, 피피티, 워드. 뭐가 되었든 모니터 화면에 흰 종이만 띄우면 막막하다. '아.. 시작을 어떻게 해야 하지..' 뒤적뒤적 다른 사람들이 만든 문서를 꺼내봐도 감이 잡히질 않아 결국 네이버 창을 띄워 검색한다.
"보고서 쓰는 법"
회사에선 배운 적도, 가르쳐준 적도 없으면서 자꾸 뭘 쓰라고 한다. 대학교 조별과제했을 때의 기억도 되살려보지만 회사 문서는 만들어본 적이 없으니 좀처럼 자신 있게 써내려 갈 수 없다. 그러니 의지할 곳이라곤 포털 검색뿐인데 어느 하나 쓸모 있는 검색 결과는 나오질 않는다.
PPT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무수한 탬플릿들이 회사에서 만드는 문서인가 싶어 몇 개 다운로드하여 내용을 채워볼까 한다. 어떻게 채워야 할까? 서론.. 본론.. 결론..? 기.. 승.. 전.. 결..?
위의 과정을 한 순간이라도 공감한다면, 안타깝지만 그렇게 해서 제출했을 문서의 피드백은 안 봐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토닥토닥
나 또한 직장생활 초반에는 문서 첫 장부터 머리를 싸매고 아무리 봐도 뭔가 빠진 것 같은 빈 깡통 같은 문서를 만들곤 했다. 부서이동 후 메일이나 문서로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빠르게 이해시켜야 하는 업무를 주로 하다 보니 점차 매끄러운 문서를 만들게 되었고 직장생활 10년 차가 되어 지금의 팀에서 문서는 김마라! 같은 매칭이 될 정도다.
처음 주변 동료들에게 "문서를 어떻게 하면 잘 써?"라는 질문을 했을 받았을 때는 "아이고 문서가 잘 쓰는 게 어디 있어, 내 문서는 다 네모, 세모, 동그라미, 텍스트밖에 없어! 그냥.. 그냥.. 그냥 쓰는 거야!"라고 답했다.
서로 다른 그룹으로부터 여러 차례 똑같은 질문을 받고 나서야 다들 어려워한다는 걸 알았고 문서 쓰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마주 앉아보니 큰 공통점을 알게 되었다.
"아 내가 진짜 글을 못써서.."
신기하게도 꼭 한 번씩 꺼내는 말이다. "글"을 못쓴다. 테크니컬 하게 입을 열고 말하는 게 아닌 키보드로 쓰기 때문에 글이 맞을 수 있지만 나는 문서를 쓰면서 글을 쓴다고 생각해 본 적 없다.
문서는 글이 아니라 말이다. 본부장님, 팀장님, 외부 파트너들, 유관부서들 붙잡고 모두에게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서. 모두의 연락처를 따낸 뒤 카톡을 등록해서 카톡으로 한 줄 한 줄 써 내려갈 수 없어서. 그래서 쓰는 게 문서다. 다만 카톡창보다 크고 못생긴 네모에 이모티콘을 못 쓸 뿐
회사에서 아무와도 대화를 섞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제도 오늘도 사수와, 팀장님과 업무에 대해 대화했다면 당신도 문서도 잘 쓸 수 있는 사람이다.
빈 문서를 앞에 두고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린 채 굳어 있다면 말로, 혹은 카톡이나 사내 메신저로 훨씬 라이트 한 보고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카톡으로 라이트 하게 보고한다고 하면 좀 더 쉽게 채워내려갈 수 있다. 키보드로 두들기지만 글이라 생각하고 쓰지 않고 말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팀장님~ 경쟁사 동향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 경쟁사 동향 보고
A, B, C 3사 모두 신규 서비스를 시작했거나 시작할 예정인데요.
: 경쟁사 리서치 대상 - a, b, c사. 3사 모두 신규 서비스 오픈 or 오픈 예정 (3사 화면 캡처)
우선 가장 메인 경쟁사인 a사가 2주 전부터 신규 서비스를 오픈했어요
: a사 상세 - 12월 1일 2주 전 신규 서비스 오픈 (서비스 화면 캡처)
근데 beta 배지를 붙여 일부 지역에 한해서만 하더라고요
: 특징 - 일부 지역(강남구, 서초구, 용산구) 한정 서비스 beta오픈 (서비스 지역 캡처)
아무래도 초기 비용이 많이 들다 보니 사용자 반응 및 수익구조를 본 뒤 본격화하려나 봅니다.
: 초기 비용의 부담으로 인해 사용자 반응 및 수익구조 확인 후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
현재까지의 사용자 반응을 보면 긍정적인 후기가 대부분이에요
: 사용자 반응 - 원하는 시간대 선택, 배송 현황 실시간 gps확인에 대해 긍정적 반응 (주요 댓글 캡처)
빈 문서를 앞에 두고 머리를 싸매는 이유는 잘 정돈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모르는 전문가들의 글쓰기 법칙이나 양식 같은 것이 있을 거라는 상상하기 때문이다.
문서엔 양식이 없다. 탬플릿도 없다. 카톡을 쓸 때 "재밌는 이야기 양식" "친구에게 여행 제안할 때 유용한 탬플릿"을 다운로드하여 맞춰 쓰지 않듯이 문서마다 전할 말이 다르고 내가 가진 자료가 다르기 때문에 매번 하얀 빈 문서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빈 문서를 채팅창이라 생각하고 '말'을 시작하면 머리를 싸매는 일은 적어진다. 확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