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회계의 꽃, 결산
이건 또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회계의 꽃은 결산이라고 한다. 출처가 정확하진 않으니, 그저 에세이적 허용이라고 너그럽게 봐주시면 좋겠다. 학교 회계는 신학기 시작인 3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다. 수업과 관련 있는 학교만 이럴 뿐, 상위기관은 신년과 함께 회계를 시작해서 12월에 마감한다. 이 말인즉슨, 학교에서 근무한다면 총 2번의 결산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뜻이다.
일반직 공무원의 경우 1월과 7월에 정기 발령이 있다. 행정실은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즉 회계 말인 겨울이 가까워질수록 점진적으로 바빠지기 시작한다. 1월에는 연말정산을 포함한 각종 정산과 내가 맡은 사업의 결산을 해야 하므로, 7월에 발령받을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인사는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 법. 나처럼 뜬금없이 9월에 발령받을 수도 있고, 만약 시험 성적이 좋다면 1월에 발령받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몇 월에 발령 받든 회계에 발을 담근 이상, 결산에서 벗어나진 못한다. 바로 추경 때문이다.
추경이란, 예산의 부족이나 특별한 사유로 인해 이미 성립된 본예산을 변경하거나 다시 정한 예산을 뜻한다. 보통 회계 말쯤 내년의 예산 계획을 세우는데, 사업별로 올해 지출했던 금액을 근거 삼아 예산을 잡는다. 새 회계연도가 시작됨에 따라 계획대로 돈을 운용하려고 노력하지만, 작년과 달라진 부분이 필연적으로 발생함으로 예산이 부족한 사업이나 넘치는 사업이 생기기 마련이다. 앞으로 필요한 돈이 얼마인지 파악하고, 넘치는 곳에서 부족한 부분으로 돈을 옮기는 작업이 바로 추경이다. 한마디로 눈덩이처럼 불어난 지출금을 몇 개월에 한 번씩 파악해 두고, 결산 때 닥칠지 모르는 눈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작업이다.
난생처음 듣는 단어에 두려움이 앞섰다. 설명을 들을수록 이렇게 중요한 작업을 나 따위가 해도 되나 싶어 걱정스럽기도 했다. 학교는 수 억대의 돈을 운영하고, 그에 걸맞게 수십 개의 사업과 그 밑에 딸린 세부 사업들이 있는데, 처음엔 이걸 다 파악해야 하는 줄로만 알고 절망에 빠졌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만둘까 싶었다. 다행히 실장님께서 내가 맡은 업무와 관련된 예산만 산정하면 된다고 부연 설명을 해주셨는데, 그렇게 추리고 추려도 양이 상당했다. 몇 날 며칠에 걸쳐 작성했더니, 지원청에서 내려주는 목적사업비를 제외한 학교 자체 예산만 추경 요구를 하면 되는 거였다. 맥이 조금 빠지긴 했지만, 어떤 사업이 학교 자체 예산으로 운영되는 건지 파악하기는 좋았다.
시간이 지나 반소매를 입고 출근하던 길에 비인지 눈인지 모를 것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상위기관의 결산 기간이었다. 결산을 위해 제출해야 할 서류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공문 하나를 간신히 해결하면 세 개가 쌓여 있는 형국이었다. 이렇게 작성하는 게 맞나 걱정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매일 몇 개씩 하다 보니 그런 생각도 사치가 됐다. 제대로 작성하지 못해서 다시 해달라고 돌려받은 것도 부지기수였다. 처음엔 실수했다며 자책하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알려주지도 않고 바로 현장에 투입해서 기한 내 해결이나 하라는 시스템에 억울함과 분노만 남았다. 실장님과 계장님(전임자였던) 덕분에 어떻게든 해결하고 나니, 겨울방학이 다가왔다. 이번에는 선생님들의 결산 릴레이가 시작되었다.
학교의 결산은 2월 말이지만, 방학에는 교사들이 출근하지 않으므로 보통 겨울방학이 되기 일, 이주 전에 결산을 시작한다. 이때는 학교 자체 예산뿐만 아니라, 지원청에서 받은 목적사업비도 같이 결산을 진행하고, 남으면 다시 지원청으로 반납한다. 아무리 해당 사업 담당 선생님들이 있어도, 모든 지출은 행정실을 통하므로, 해당 사업 지출 담당자도 1년간 지출한 내역과 잔액을 파악하느라 덩달아 바빠질 수밖에 없다. 또한 잔액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경우, 소위 털기-반납하지 않으려고 잔액을 다 써버리는 것을 뜻한다-라고 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그러므로 결산 때가 되면 지출의 향연이 열린다.
자료 제출만 하면 그만인 기관 결산 때와는 달리, 학교 결산은 남은 금액이 정확해야 한다. 기관 결산 때 예산과 지출 내역 보는 법을 배웠으나, 그걸 아무리 보고 또 보고, 계산기를 두들겨 봐도 잔액이 맞지 않았다. 그래도 오차범위가 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찰나, 대망의 학교 회계 직원의 인건비 반납 공문이 내려왔다. 교육공무직원 중 학교에서 인건비가 나가는 직종이 있는데, 이건 목적사업비로 지원청에서 1년 치 인건비가 들어온다. 인건비에는 급여, 위험수당 같은 월마다 지출해야 하는 것부터 연차수당, 퇴직금같이 1년에 한 번만 지급하면 되는 항목까지 포함된다. 문제는 때마침 자주 변경된 임금 협약으로 인한 추가 인건비 교부액과 아직 정확하게 산출하지 않은 1년 치의 연차수당과 퇴직금이었다. 겨우겨우 몇 날 며칠에 걸쳐 인건비를 결산해 보는데, 무려 천만 원 가까이 예산이 남아 있었다.
다른 목적사업비의 경우, 남은 예산으로 교재나 교구를 산다든가 협의회를 하는 등으로 잔액을 털 수가 있었지만, 인건비의 경우는 다른 사업으로 턴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고, 무려 천만 원이나 되는 금액을 어디다 쓸 수도 없었다. 왜 이렇게 많이 남았는지 알아야 실장님께 설명해 드리니, 또다시 초과근무 행이었다.
원인은 예산 내역서였다. 내역서에는 작년 말 담당자가 다음 해 예산을 요구한 금액만큼만 표시되고, 추가 교부된 예산은 반영이 되지 않았다. 당연히 항상 예산이 부족해 보였고, 나는 인건비 부족분 신청 공문이 올 때마다 신청을 했던 것이다. 늦지 않게 실장님께 말씀드리고, 원활하게 반납을 진행했다. 물론 반납을 마친 뒤에 또 실수를 발견하긴 했지만, 다행히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노이로제가 걸린 탓인지, 선생님들이 예산 혹은 반납에 대해 문의하면 긴장부터 된다. 두 번의 결산을 겪은 지금도 그렇다. 매번 결산 때마다 실수가 있었기 때문일 테다. 회계의 꽃은 결산이라고 했던가. 1년 동안 달려온 지출의 끝에서 화려하게 절정을 맞이한다는 점에서 꽤 일리가 있는 것 같다. 다만 그 꽃엔 독성이 있을 뿐…. 세 번째 결산이 다가온다. 주기적으로 예산과 지출 내역을 파악하지만,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해당 엑셀을 열 때마다 기도하듯 이번 결산에는 부디 실수가 없기를, 만약 실수가 있더라도 혼자 해결 가능한 일이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