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쉐 영국연수기_21] 고스니 팜2
*2019년 8월에 다녀온 이야기를 정리한 글입니다.
전편에도 말했듯, 고스니팜Gothelney Farm 농사의 중심은 순환이다. 그리고 그 순환의 큰 축에 바로 밀이 있다. 다양한 풀과 채소들을 키워 돼지들이 먹고, 그 돼지가 땅을 이롭게 하고 농장에 수익도 만들어주면 농장은 그 덕분에 밀농사를 안정적으로 지을 수 있는 구조다. 밀농사를 지었던 밭은 밀 수확후 다시 다양한 풀을 키우며 땅을 회복하고, 밀짚은 돼지들이 깔고 지내다가 땅으로 다시 돌아간다. 커다란 농장 안의 밭을 구획해서 순환하며 경작하는 이러한 구조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밀을 키울 때 화학제품을 별도로 넣지 않아도 땅이 건강하고 밀이 잘 자란다. 영국에서는 밀을 봄에 파종하고 8월 하순에 수확하는데, 이러한 순환구조 때문에 농장 전체가 1년 동안 비어 있는 시기는 없다. 고스니팜은 유기농업 농장을 표방하지는 않지만, 프레드Fred Price는 그런 방식으로 밀을 건강하게 키워 베이커들에게 보내고 있다.
프레드는 결국, 고스니팜에서는 좋은 밀을 키우기 위해 돼지를 키우는 것이라고 했다. 이 모든 과정을 해나가는게 돼지가 있기에 가능하다고. 농사 뿐만 아니라 농가 경영과 관련해서도,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 가는데 필요한 씨앗들을 사는데에도 돈이 들고, 좋은 밀을 키우기 위해서 땅을 3-4년 동안 묵혀야 하는데 그 사이에 수익이 없으니까 이러한 수익 부분에서도 돼지를 키우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이러한 구조를 위해 다른 농장들은 돼지가 아니라 소를 키우는 곳이 많다고. 프레드는 앞으로의 식사는 하이퀄리티로 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소규모 축산으로 가게 될거라고 전망했다 .
햇살 좋았던 그날, 돼지들은 넓은 농장을 우루루 뛰어다니며 자유롭게 놀고 먹고 자고 흙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프레드와 얘기하는 동안 커다란 엄마돼지들과 작은 아기돼지들이 거리를 유지하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궁금해하는 만큼 돼지들도 한국에서 온 낯선 우리가 궁금했겠지. 다들 풀이라도 뜯어서 흔들며 귀여운 아기돼지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애를 썼는데, 몇몇 장난꾸러기 돼지들이 다가와 킁킁 냄새 맡아준 것만으로도 대만족!
이 너른 풀밭 중간 중간에 있는 낮은 회색 오두막이 궁금했는데, 영국은 법규상 돼지를 키울 때 돼지 집을 설치해야 해서 지붕이 있는 쉘터를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돼지들이 이곳에는 거의 들어가지 않아 완전히 방목하고 있고, 겨울에는 원모양으로 된 큰 오두막(shed)에서 지내게 한다고 한다. 현재 거의 400마리의 돼지들이 있는데 1에이커(1200여평)에 어미돼지 3~4마리, 어미당 아기돼지들 7~8마리가 있게 하는데, 상업적인 농장은 10-11마리 정도 있게 한다고 한다.
이곳의 돼지들은 영국의 토종 돼지로, 영국에서도 일반적으로 많이 키우는 종은 아닌데, 천천히 자라는 대신 맛과 품질이 더 좋다고 한다. 농부와 레스토랑이 서로 협의하여 시기를 잡아 도축하는데, 농장에 좋은 타이밍이 레스토랑에도 좋은 타이밍이라고.
프레드는 산업이나 기업 농업은 본사에서 농부에게 농사 정보도 다 제공되는 형태지만, 이런 소규모 독립 농부의 입장에서는 자기 스스로 다 해야 하는 어려움을 잠깐 이야기했다. 예를 들어 고스니팜에서는 돼지 사료를 안쓰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지만 계속 이런 저런 시도를 해보면서 스스로 해답을 찾고 있다고 한다. 3년동안 루썬lucerne(알팔파)을 4인치 정도 잘라서 한동안 발효시켰다가 돼지에게 먹이고 있는데 겨울에는 돼지가 루썬 밭으로 와서 직접 먹게 한다고. 그 다음에는 다른 곳에 또 심어서 돼지를 이동시켜 먹게 하는 방식으로 밭들을 순환시킨다고 한다. 그냥 기존 시스템에 반대하는게 아니라 스스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계속 생각하고 실험해보는 것이라는 농부에게서, 이러한 실험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딪혀나가는 단단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우리는 바로 이 돼지들 덕분에 만나게 된 고스니팜과 슈퍼8 그룹 레스토랑들과의 협력구조에 대해 물었다. 기존 부모님의 농사에서 프레드가 합류하며 농장의 변화가 시작되었는데, 그래서 농부가 해야 할 일이 많았다고 한다. 프레드가 처음 이 시스템을 시작했을 때는 돼지가 최고의 맛이 나지 않았지만, 한 쉐프의 소개를 통해 수퍼8 그룹의 대표이자 투자자인 벤을 알게되어 제안을 받았고 서로 이야기를 시작해서 돼지를 전량 구매해주는 방식의 계약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 시스템을 운영한지 2년 정도 됐는데,이 레스토랑들은 이런 농부들과의 관계를 홍보용으로 쓰지 않고 묵묵히 이 일을 해가고 있다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든다고 했다.
프레드는 기존 유통방법이 마음에 안 들어서 지금 방식으로 하게 되었는데, 믿음과 신뢰를 통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존에는 농부들이 생산한 후 이걸 어떻게 팔 수 있는지 얼마의 가격을 받을 수 있는지 묻는 방식이었다면, 프레드의 방식은 나는 이렇게 키웠으니 내가 원하는 가격을 정해서 팔겠다고 말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계약생산 등이 가능한 것인데, 레스토랑도 퀼리티가 좋은 것을 알기 때문에 구매하고 있다고.
농부가 이 시스템을 하고 싶다고 제안하고 레스토랑 대표가 함께 하자고 협업해서 운영되는 현재의 시스템은 영국에서 여기가 유일하다며, 프레드는 이 관계가 ‘서로에게 행운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단순하지만 이런 말이, 협업을 하는 파트너 사이에 가장 큰 힘이자 기쁨일 것이다.
이런 협업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농장 전체의 생산비용이 생산량에 비해 많이 들어가고 있는 것이 고스니팜의 고민이라고 한다. 영국도 농민들은 빚에 허덕이고 있는데, 고스니팜이 있는 동네에도 10년 전에는 8가구의 농가가 있었는데 현재 2농가만 남았다고 한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농사로 먹고 살 수 없고, 젊은 사람들은 도시에 살고 싶어하고 등등의 이유로 마을을 떠난 것이다. 프레드는 그래서 지속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예를 들어 돼지 집을 시공하는데 돈이 들어서 옥수수를 키워 에너지 프로덕션에 판매하기도 하면서 구조를 찾고 있다고. 비록 이 방식이 농장의 스토리와 맞지는 않지만, 농장의 생존을 위해 돈을 구하는 농사도 겸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소규모 독립 농가가 지속하려면 많은 것들이 필요한데, 그 핵심에는 경제적 구조를 빼놓을 수 없다. 자신만의 철학과 고집을 가지고 농사를 이어가다가도 그런 현실적인 판단 앞에서 고민하게 되는 순간이 있음을, 마르쉐 농부님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종종 듣게 된다. 예를 들어 몇해 전, 유기농 인증을 받고 멜론을 키우던 젊은 농부님이 수확 직전 농약을 사용하며 인증을 포기하게 된 이야기를 들었다. 1년에 한번 정성껏 키워서 한해 농가 수익의 대부분을 보장해주는 멜론이 다 영글어 수확하기 직전, 병충해가 순식간에 심하게 번졌다고 했다. 농부님은 고민 끝에 결국 농사를 지속하기 위해서 현실적인 판단을 했다고 했다.
자연에 가까운 농사를 짓기 위한 농가들의 수많은 노력들 중 하나인 유기농 인증은 받는 것도 지켜나가는 것도 굉장히 어렵다. 그런 인증을 포기하느냐 정성껏 키워온 다 큰 작물들과 더불어 한해 농가 수익을 포기하느냐 사이에서 농부님은 전자를 선택했고, 나는 그런 선택을 존중하고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똑같은 상황에서도 계속 어렵고 힘든 결정을 하며 그 어려운 유기농 인증을 이어가는 농부님들이 많은 것도 알고 있고, 나는 그 선택도 마음 깊이 존중하고 응원하고 있다.
농부시장 일을 하면서 계속 각 농부마다 삶의 방식, 농사의 방식은 다 다르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그것을 들여다보고 농부님이 어떤 고민과 노력을 하고 계신지를 알게 되면, 옳고 그름이나 좋다 나쁘다라는 판단 기준은 모호해지고 다만 응원하는 마음만 남게 된다. 이 응원은 어떤 결정에 대한 것이기보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농사를 지속해나가는 농부님의 삶 자체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며 밀 밭에 도착했다. 고스니팜에서 키우는 밀은 토종밀은 아니지만, 근래에 개량한 것이 아니라 영국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온 밀이라고 한다. 이런 밀을 키우게 된 이유는, 유기농 밀농사를 짓는 이웃이 비료를 200kg이나 넣어서 키워도 밀농사가 잘 안된다고 하길래, 프레드는 다른 것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몬산토 등의 종자가 아닌, 땅에 많은 투입을 안해도 되는 씨앗을 찾아보다 씨드뱅크에 가서 한줌, 약 5g정도의 밀 씨앗을 얻어와서 심고 매년 늘려오면서 지금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까지 양을 늘리는 게 힘이 많이 드는 일이라 다른 농장에서는 씨앗을 달라고 하면 안주지만 프레드는 생각이 다르다고. 기후 위기 등을 생각할 때 여러 농부들이 더 다양한 씨앗을 나누고 실험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씨앗을 달라고 하는 농부에게 내어준다고 했다.
교잡이 잘 일어나는 밀의 특성상, 이웃에서도 밀농사를 짓기 때문에 많은 교잡이 일어나는데 프레드는 그건 개의치 않는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자신의 농장의 밀이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에 맛의 변화를 지켜 보면서 키우고 있다는 쿨한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지금 기르고 있는 밀은 ‘에어프릴 비어드 April Beard(4월의 수염)’라는 이름의 품종인데, 일반 밀과 비슷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다. 프레드는 지속가능한 관계를 하기 위해서 밀의 가격을 높게 하지 않는다고. 잘되는 종자는 이렇게 전체 면적의 80% 정도로 넓게 재배하고, 맛이나 씨앗의 지속성을 위해서 여러 가지를 작은 규모로 키우는 땅도 있다. 매년 다양한 밀들을 키우고 선택해서 기르는 과정은 계속되고 있다고.
고스니팜에서 생산되는 밀은 전부 로컬의 작은 빵집들이 사용하는데, 프레드는 좋은 빵을 위해서는 천연발효종과의 관계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밀의 종류에 따라 맛이나 향이 다른데, 이런 작업을 하는 베이커들은 다양한 대여섯 종의 밀가루를 섞어서 만든다고 한다.
프레드는 이런 밀농사를 혼자 지으면 경제적 리스크 등 여러 가지 리스크가 있기 때문에 여러 농부와 같이 키우고 있다고 한다. 80종 정도의 씨앗을 여러 농가가 나누어 심는 방식이다. 베이커 몇 명과 블로거 1-2명, 농부 몇 명이 6주에 한번씩 모여서 같이 회의하고 다양한 밀을 맛 보고 블랜딩도 해보고 하면서 가격을 맞춰간다고 한다. 개별 농부들이 가진 리스크에 대해서 회의도 하는데, 예를 들어 8월에 비가 많이 올 것 같아 수확에 문제가 생길것 같다 하면 작년 밀과 올해 밀을 섞어서 그걸 가격에 다 포함시킨다고 한다. 1년이 아닌 3-4년 단위로 보고 생산하며 리스크를 줄이는 방식이다. 아, 이 농부님 참 대단하네!
이렇게 구워진 빵 한덩이에는 밀 뿐만 아니라 돼지와 풀과 채소와 농부와 레스토랑이 함께 만든 시간이 모두 들어있다. 이 커다란 순환에서 태어나 식탁에 오르는 빵의 맛과 향이 궁금할 수 밖에 없다.
전에 브레드바이바이크 Bread by Bike Bakery 편에서도 얘기했듯, 마르쉐는 매년 7월 햇밀 농가와 베이커들이 함께하는 햇밀장을 열어왔다. 바로 이런 많은 시간이 담긴 밀의 맛을 신선할 때 바로 맛보고 올해도 햇밀이 수확되었음을 축하하고 싶어서이다.
6월 말쯤 수확된 햇밀을 받아 여러번의 실험을 거쳐 올해의 햇밀빵을 굽는 베이커들의 작업은, 7월 두번째 일요일에 열리는 햇밀장에 참여하기 직전까지 늘 너무 바빴다. 게다가 7월 야외 시장의 열기는 햇밀장을 준비해온 많은 사람들의 열기만큼 뜨겁고 습했다. 거기에 코로나19가 겹쳐 올해 2020년 햇밀장은 한달 미룬 8월 9일에 개최하기로 하고, 현재 한창 준비중이다. 매년 조금씩 함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5번째 개최되는 올해 햇밀장에는 전국의 햇밀 농가 15여팀과 베이커 20여팀이 모인다. 방역 때문에 현장에서 직접 맛보는 즐거움은 줄겠지만 올해도 마르쉐답게 소박하고 알찬 시간이 되지 않을까?
우리는 프레드와 친구들의 협업처럼, 이 햇밀장이 생산자와 소비자가 연결되는 것을 넘어 생산자와 생산자가 연결되고 서로의 농사와 작업을 지속가능하게 해주는 새로운 관계와 힘을 만들어줄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프레드는 귀가 쫑끗해지는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해주었는데, 아는 농부 중 진뱅크GenBank (유전자은행)를 연결시켜서 그 소스를 가지고 지도를 얹어서 날씨와 조건에 맞는 밀을 찾아내는 온라인 프로그램을 만든 분이 있다고 한다. ( http://www.brockwell-bake.org.uk/wheat) 주로 미국과 유럽쪽 밀의 정보들이 많은데, 한국의 농부들도 많이 연결되면 좋겠다고.
기후변화의 시대에 꼭 필요한 일이라는 프레드의 말처럼 한국도 날씨가 점점 종잡을 수 없는 환경이 되고 있으니 이런 기술은 정말 필요한 일이다. 당시에는 어서 돌아가서 한국의 밀 농부들에게도 이 사이트를 꼭 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마구 일었으나, 온통 영어로 되어있어서 그리 적극적으로 전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수확기가 다가와 누렇게 잘 익은 밀 밭 가운데서 다같이 사진을 찍고 마무리했다. 당시에도 고마웠지만, 돌아와서 정리해보니 프레드는 짧은 시간에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었다. 우리는 투어의 시작을 너무 멋진 농부와 농장에서 했다는 생각에 들떴는데, 이후로 만나게 될 농부들 모두 우리의 마음과 머리를 마구 마구 쳤다.
무려 1년이 다되어가는 지금, 글을 정리하면서 되돌아보니 다시 두근 두근. 성심껏 농장의 전체 순환을 보여주며 같이 꿈꾸게 해준 프레드, 그리고 우리를 기꺼이 이 멋진 농가투어에 데려가준 레스토랑 식구들과 송수, 다시 한번 정말 고마워요!
농장에 도착해서는 바로 이동하느라 잘 못봤는데, 나오면서 보니 농장의 입구 울타리에 작은 간판이 눈에 띈다. 돼지꼬리와 밀을 재치있게 연결해놓은 로고에 무릎을 탁! 이 그림에 고스니팜의 현재와 미래가 고스란히 담긴 듯 했다.
자, 다음은 어디로 가나요?
농부가 된 쉐프의 농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