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어릴 때 뭐 되고 싶어 한 줄 알아? 립스틱 가게 아줌마."
"아냐, 교도소 가고 싶다고 했었어. *야생초 편지 읽고."
"언니 슈퍼 주인 하고 싶다고 그랬는데. 과자 왕창 먹을 거라고."
계절에 한 번 모이는 가족의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를 하든 꼭 어린 시절로 흐른다. 사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기에는 설명해야 하는 맥락이 너무 많아 그런 건지, 역시 추억팔이만 한 재미가 없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꼭 어린 시절. 최소 어린이 시절부터 걸음마도 떼기 전 갓난아이 시절까지 정말 옛날이야기라 할만한 시절로 빠진다. 오늘은 기억도 안 나는 내 꿈이 주제다. 내가 대체 언제 립스틱 가게나, 교도소, 슈퍼 주인을 꿈꿨을까. 기억 안 난다고 웅얼거려 봤자 오늘의 놀림감은 이미 나로 정해진 건지 모두 놀리기에 여념이 없다.
엄마 화장대에 있는 것보다 몇 배는 립스틱을 가지고 있는 립스틱 가게 아줌마가 멋있어 보였던 것 같긴 하다. 그땐 화장품을 쓰는 어른이면 무조건 다 멋졌다. 엄마 몰래 립스틱을 훔쳐 바르다 혼난 건 클리셰 수준이고, 영양크림 훔쳐 바르다 피부가 뒤집어진 적도 있다. 야생초 편지를 재밌게 읽은 기억도 있다. 당시 식물도감에 빠져 있던 나는 식물도감과 야생초 편지를 번갈아 가며 닳도록 읽었다. 그 결론이 왜 교도소가 되었는지, 애초에 교도소 가겠다고 하긴 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래도 과자를 좋아했던 적은 없는데. 내 기억에 과자 좋아했던 건 동생이다. 그건 걔 꿈이 아니었을까.
내가 아는 최초의 꿈은 우주 비행사였다. 립스틱도 교도소도 슈퍼도 아닌 우주에서 떠다니는 것. 과연 최초라는 단어에 붙을만한 멋지고 환상적인 꿈.
꿈을 결정한 순간까지 기억한다. 3학년 1반 조예원 어린이는 평소처럼 책에 푹 빠져 있었다. 마흔 권짜리 어린이 과학 만화 전집은 몇 번이나 읽었는지 말풍선 대사를 줄줄 읊을 정도였다. 우주의 진공에 사람이 맨몸으로 나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다 크고 나서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 책에선 우주에 나가면 사람 몸이 기압 차이로 인해 빵처럼 터진다고 했다.-, 우리 은하는 어디쯤에 있는지, 지구가 얼마나 작고 특별한 행성인지. 신비롭고 환상적인 내용에 도무지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상처럼 과학 만화를 펼치고, 성운과 성간과 암흑물질에 대해 소개받던 중 결정했다. 나는 우주 비행사가 될래.
꽤 진지한 꿈이었다. 최초의 검색 경험도 '우주 비행사가 되는 법'이었다. 어떻게 하면 우주 비행사가 될 수 있냐는 질문에 아빠가 다음인지 네이버인지 포털 사이트를 알려주더니 직접 검색하라며 검색 방법을 가르쳤다. 교육 방침이었는지,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했던 건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우주 비행사가 되고 싶어서 검색하는 법을 배웠다. 만나는 어른마다 '너는 꿈이 뭐야?'하고 묻던 그 시절, 나는 누가 내 꿈을 물어봐주기만 기다리면서 냉큼 '우주 비행사가 될 거예요!' 했다. 되고 싶어요도 아니었다. 될 거였다. 어릴 때부터 낯가림이 심해서 모르는 사람만 만나면 온 몸을 배배 꼬고 책으로 도망치기 일쑤였는데 우주 비행사라는 꿈만큼은 세상에 떠들고 자랑하고 다녔다.
밤마다 평상에 누워 하늘만 뚫어지게 쳐다보는 딸을 위해 아빠는 플라스틱 천체 망원경을 구해 왔다. 실은 일반 망원경이나 마찬가지인, 천체 망원경이라는 말이 거창한 수준의 것이었으나 달이 눈에 가득 차도록 커다랗게 당겨주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밤하늘만 봐도 알아서 자라던 내 꿈은 천체 망원경이 생기고 더 쑥쑥 자라기 시작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동생과 함께 마당에 나가 망원경을 두고 하늘을 두리번거렸다. 저게 북두칠성인가 봐, 그럼 저게 북극성인가 봐. 내가 그런가 봐 하면 그런 줄 아는 동생에게 별자리를 찾아 보여주는 건 피아노보다, 책보다도 더 재미있는,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놀이였다.
우주. 그 두 글자만 보면 우주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신비로 가득한 미지의 세계에서 헤엄치는 상상을 하면 마음이 터질 것처럼 요동쳤다. 우주만큼, 수금지화목토천해명만큼 나를 들뜨게 하는 것도 없었다. 우주를 생각하면 내 발을 묶고 있는 중력은 희미해지고 몸이 둥실 떠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캄캄하고 아득한 우주에서 떠다니는 꿈을 꾸면 언제나 포근하게 잠에서 깼다. 새까만 우주 한가운데, 달도, 화성도, 금성도 아닌 우주의 빈 공간 어딘가에서 둥둥 떠다니고 말 거야. 매일 꿈꿨다.
그날도 확신과 자랑으로 꿈을 뱉은 날이었다. 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양호실이었고, 간단한 치료를 받던 그 와중에도 나는 우주 비행사가 될 거예요 하고 말했다. 그에 양호 선생님은 답했다. 우리 아들이 나사에 다니는데, 정말 똑똑한 사람들만 다닐 수 있는 곳이고 어쩌고 저쩌고. 양호 선생님의 말이 진실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인정사정없었던 결론은 똑똑히 기억한다. 키도 커야 하고, 몸도 건강해야 하고, 공부도 잘해야 하고. 우리 아들이 다니는 그런 대단한 곳에 너는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키는 앞으로 클 건데, 공부도 더 열심히 할 건데! 아니 애초에 공부를 그렇게 못 한 적도 없었다. 얼얼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우주 비행사가 되는 법을 찾았던 방법으로 우주 비행사가 될 수 없는 이유를 찾았다. 우주 비행사가 되려면 키는 165는 되어야 하고, 시력도 2.0에 가까워야 하고, 방사능 테스트도 받아야 하고, 감기 따위는 걸리지 않는 강철 같은 몸이어야 하고, 하고, 하고, 하고. 그렇다. 양호 선생님 말이 맞았다. 키 순서대로 줄을 설 때마다 예외 없이 첫 번째에 서는 나는, 맨날 맨날 감기를 달고 사는 나는 될 수 없을 거였다. 정말 이룰 수 없는 꿈이구나. 과학 만화 전집을 반질반질해지도록 읽으면서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던 꿈이 순식간에 불가능해졌다.
첫사랑처럼. 허무하게, 간단하게, 이뤄지지 않고서. 낭만과 설렘, 꿈꾸는 법을 가르치고. 내 마음대로, 꿈꾸는 만큼 가질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남기고.
최초의 꿈은 이렇게 끝났다.
*황대권, <야생초 편지>. 13년 간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저자가 야생초를 관찰하며 남긴 편지를 엮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