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원 Jan 19. 2021

잘 부탁해.

"밥 잘 챙겨 먹고. 도착하면 전화할게."


 끝내 걱정되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엄마는 백미러로 힐긋힐긋 나를 돌아보다 떠났다. 한 짐을 쏟아낸 뒤 한결 가벼워 보이는 모하비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든다.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모하비 뒤꽁무니 라이트가 묘하게 웃는 표정 같기도 하고. 그래, 너도 고생했다. 마음으로 인사를 전한다.

 인사차 잠깐 나온 거라 외투 없이 서있었더니 몇 분 사이 손이 꽁꽁 얼었는데도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서운해서 그런 건 아니고, 곧장 방으로 들어가자니 앞으로 정말 혼자 지내야 한다는 사실도 그렇고 자취방이라는 곳도 좀 어색하다. 자취방. 그 단어부터 이상하다. 일단 '집'이라는 말이 붙지 않는 것부터가 집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이놈의 낯가림은 이제 집에까지 적용되는 건지, 아님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 나 스스로에게까지 낯을 가리는 건지 헷갈린다. 잠깐 낯가리는 사이 어깨까지 꽁꽁 얼었다. 서울 추위 장난 아니네. 고작 차로 네 시간 거리인데 광주와 체감온도 차이가 심했다. 전기가 통한 것처럼 손가락부터 어깨까지 타고 올라오는 냉기에 몸을 부르르 떨고 공동현관문 비밀번호를 더듬더듬 누른다. 나중에 술 먹고 기억 안 나면 어떡하지. 메모장에 적어둬야겠다. 시시콜콜한 생각이 이어진다.


 앞으로 최소 2년간 살아야 하는 이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기 때문에 4층까지 꼬박 계단을 올라야 한다. 추워서 발을 빨리 옮기느라 촐랑댔더니 발가락에 달랑이는 슬리퍼가 착- 착- 길게 끄는 찰진 소리를 낸다. 한 층에 원룸만 네 개씩인데 슬리퍼 소리만 온 계단에 울린다. 사람이 살고 있는 게 맞을까. 어떻게 이렇게 인기척도 없이 빈 건물처럼 텅 빈 소리가 나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방음이 잘 되는 것 같진 않던데.. 어젯밤엔 옆 집 화장실 문 닫히는 소리부터 설거지 소리까지 들렸다. 그렇게 생각하니 슬리퍼 끌리는 소리도 누군가에겐 거슬리겠다 싶어 걸음이 조심스러워진다. 어느새 4층 계단 정상에 오르고, 문 앞에 도착하면 계단 오르는 사이 가빠진 숨과 시끄러워진 심장을 자각한다. 앞으로 집에 들어오기 전엔 편의점에 꼭 들러야겠다. 집에 한 번 들어오면 다시 나가는 일이 없도록.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 세입자는 다리가 튼튼해야겠어. 내 허벅지가 굵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문을 연다.


 한눈에 파악되는 한 칸 방이 행거와 책상 덕에 더 좁아졌다. 매트리스는 이불 깔듯 매일 펴고 접으며 살기로 했다. 아니면 빨래 널 공간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엄마 손이 닿으니 작은 공간이 알차게 정리가 되었다. 깔끔한 방을 보니 또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된다. 나름 어른스러운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다. 그렇게 기다렸던 독립인데, 어제부터 왜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놀이공원에서 엄마 손 놓친 애가 된 것처럼 초조하고 서럽다. 미아가 됐던 경험은 없으나 분명히 비슷한 기분이지 않을까. 그렇게 집에서 나와 살고 싶어 했으면서 은은한 불안과 외로움이 가시질 않는 내가 영 볼품없다.


 기분 전환할 겸 물건 위치도 파악할 겸 방 구경에 나섰다. 엄마가 하는 게 빠르다며 죄다 손도 못 대게 하는 바람에 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싱크대 찬장을 여니 식기가 한가득에 온갖 종류의 조미료, 세트째로 들어있는 칼까지 작은 방에 살며 갖추기엔 과한 감이 들도록 온갖 것들이 갖춰져 있다. 커피 대신 유자차가, 누텔라 대신 딸기잼이 놓인 걸 보니 그야말로 엄마의 흔적이다 싶고, 문 열고 나가면 광주 집이 나올 것 같기도 하고. 특히 그릇이 그렇다. 한 번도 내 취향인 적 없던 포트메리온 세트는 광주 집에서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디자인인 데다 양도 많았다. 또 서울 올라올 때 다 같이 밥은 먹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냐면서 네 명 분을 챙겨서 그렇다. 누가 오더라도 나가서 먹거나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친구를 초대할 수도 있으니까. 서울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없으면서 어디에 친구라도 숨겨둔 것처럼 계획하며 과한 식기를 품기로 했다. 나중에 챙겨도 될 걸 사서 걱정하는 습성은 유전이 분명하다.

 안 그래도 눈에 거슬리는 노란 장판 구석엔 걸레가 곱게도 개켜져 있다. 엄마는 어제 저 걸레로 몇 번이나 방바닥을 싹싹 닦더니 깔끔하게 빨고 보송하게 말려 예쁘게 개어놓기까지 하고 갔다. 한 번씩 걸레로 닦아줘야 방바닥이 깨끗하다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닦으라고. 과연 그 말을 들을지는 모르겠다. 걸레 빨 생각에 벌써부터 귀찮다. 행거 아래 접힌 라텍스 매트리스와 극세사 이불에서도 엄마 취향이 보인다. 극세사는 참 좋은데 별로란 말이지. 보들보들한 건 좋은데 몸에 과하게 밀착되는 것이 이불에 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답답하다. 심지어 이 방에서 제일 큰 면적을 차지하는 책상과 벽을 다 차지하는 블라인드는 또 아빠 취향이다. 흰색에 회색 한두 방울이 떨어진 것 같은 두 물건은 색만 놓고 보면 괜찮은데 재질이 묘하게 거슬린다. 아무튼 내 취향은 아니라는 뜻이다.


 방을 차지한 물건들을 따로따로 보면 괜찮은데 모아두니 조화롭지가 않다. 물건 고르는 것만 봐도 이렇게나 다른 사람들끼리 어떻게 같이 살았을까. 그래서 그렇게 매일 같이 싸우며 지낸 건가. 직사각형 방을 대각선으로 나눠 한쪽에선 엄마가, 한쪽에선 아빠가 채워진 방을 보고 있자니 미아된 마음이 깔끔하게 물러난다. 세심하게 다 챙겨주시는 마음이 정말 감사하나 과보호 받는 느낌이라 달갑지 않다. 애초에 서로가 과보호에 익숙한 사이가 아니기도 하고.

 모하비 뒤꽁무니에 대고 보냈던 애틋한 맘은 어디 갔는지 금세 무뚝뚝한 큰 딸 모드가 켜졌다. 이게 게임이었다면 새로운 챕터의 시작을 알리는 알림창이 떴을 법한 무드 전환이다. 차분해진 머리로 구석구석 내 취향이 아닌 이 공간을 바꿔나갈 계획을 세운다. 아무래도 그릇은 사진에 잘 나올만한 깔끔한 그릇이 좋겠다. 매트리스는 흰색 커버로, 노란 장판은 러그로 가리고 블라이드 대신 커튼을 달아야지. 집 꾸밀 마음만으로 어느새 낯가림도 가시고 벌써 정이 들기 시작한다. 잘 부탁해. 무엇부터 무엇까지 잘 부탁해야할지 모르겠으니 모든 것을, 그리고 그 중에서 특히 꿈을, 잘 부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上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