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릴 적부터 도시를 동경했다. 은하수가 또렷했던 시골도, 초중고를 모두 나온 광주도 내가 속할 곳이라 여기지 못했다. 그저 서울로 가고 싶었다. 어떤 미디어나 말도 아닌 꿈, 그놈의 꿈 때문에.
뻔한 이야기다. 90년대 바쁜 맞벌이 부부의 자녀는 매일같이 TV 앞에 앉았고, 스크린 너머 세계를 동경했고, 드라마 PD가 되기로 결심했다. TV를 보며 자란다고 누구나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겠으나 나는 그랬다. 우주 비행사를 꿈꾸던 첫사랑과는 다른 시작이었다. 스미듯 사랑에 빠졌고 자각할 때가 되니 PD 말고는 하고 싶은 일이 하나도 없었다. 일부러 찾을래도 찾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공부를 열심히 했고, 진로를 정하는 데 어떤 조언도 의견도 구하지 않았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내 인생은 방송국까지 단 하나의 길만 존재했다. 그렇게 당연한 수순처럼 서울에 왔다.
나는 안달이 난 사람처럼 매일 걷고 서울을 밟았다. 강아지가 영역 표시를 하는 것과 비슷했다. 새로운 동네, 새로운 골목, 새로운 가게에 내 체취와 발걸음을 묻히고 싶어 마음이 끓었다. 내가 동경하던 도시에 하루라도 빨리 스미고 싶었다. 하루를, 또 그 시간과 분을 통과한 모든 순간 나는 여행을 시작한 것처럼 설렜다가 흥분했다가 조급해졌다. 짝사랑을 닮아 울렁이고 서러운 마음으로 그렇게 무작정 걸었다. 어깨가 지끈 해지는 무거운 카메라를 이고 지고 티끌만한 영감에도 바로 렌즈를 들이밀었다. 순간도 놓치기를 아까워하면서. 내가 꿈꾸던 곳에서 갈망하던 사람으로 크기 위해 매일 마음이 치열했다.
스무 살을 혜화에서 시작한 것은 행운이었다. 혜화는 서울을 동경하는 스물이 살기에 완벽한 동네다. 처음 밤 산책을 나선 날 마주한 마로니에 공원 여기저기엔 버스커가 기타를 잡고 연주하고, 그의 주변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일행과 맥주를 기울이고 음악에 박수를 보내며 풍경처럼 자연스럽게 존재했다. 내가 꿈꿨던 서울의 모든 장면이 혜화에 모여있었다. 투박한 가게 사이에서 보석처럼 발견되는 개성 강한 카페와 음식점과 술집. 별이 또렷한 와룡 공원과 종로를 구경하러 올랐던 낙산 공원. 잔뜩 흥분한 목소리와 과장된 몸짓으로 차로를 인도처럼 걷는 청년 무리와 한 몸처럼 걷는 연인들. 혜화를 관통하는 대로, 한 골목만 접어 들어가도 구불구불 복잡하게 펼쳐지는 뒷골목. 상상력을 자극하는 고궁의 성벽, 예술가, 연극, 미술관. 내가 꿈꿨던 서울의 모든 장면이 모인 혜화에서 어서 빨리 서울의 풍경이 되고 싶어 매일같이 밤 산책에 나섰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산책길은 창경궁을 지나 돈화문과 안암역을 거쳐 광화문까지 가는 루트였다. 집에서 나와 걸으면 편도 한 시간 정도가 걸리는 길이라 친구들이 응해줄 때는 많지 않았고 대부분 혼자 걸었다. 혼자 나서는 밤 산책은 오히려 반가웠다. 자동차 헤드라이트에도 영감이 솟아 뭐라도 쓰거나 찍고 싶은 충동이 들었는데 그 충동만으로도 이미 드라마 PD가 된 것처럼 설렜기 때문이다. 점점 나는 혼자를 자처하고 혼자 걷기를 즐겼다. 정준일, 10cm, 스웨덴 세탁소, 보드카 레인. 비슷하면서 다른 노래를 배경으로 걷다 보면 생각과 생각의 틈에 오래된 성벽과 자동차 소리, 가로등 빛이 들이찼고 그런 모든 자극은 반드시 어떤 영감을 불러와 내 드라마의 장면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어떤 마음과 기분에 처해있든, 어떤 풍경과 음악에서든 내 머리는 눈에 비친 풍경에 드라마를 대입하느라 바빴고 모든 생각은 결국 드라마로 이어졌다. 사랑을 시작할 때면 이별하는 장면을, 사랑을 끝낼 때면 헤어진 연인이 우연히 재회하는 장면을. 유난히 낭만적인 기분이 드는 밤엔 처연한 사극을 만들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다. 광화문에 도착할 즈음이 되면, 그 어떤 고민과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그대로 남았으나 꿈에 대한 확신만은 더 강해졌다. 드라마 PD가 아닌 사람이 되는 것은 떠올리기도 힘들었다. 그렇게 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면 맥주 한 캔과 드라마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꿈을 키우는 것만큼은 아주 간단하고 순조로웠던, 그래서 서울에 나를 매이게 했던 혜화에서. 연애도, 취업도, 대학생활도 무엇하나 쉬운 게 없던 서울살이를 버티게 한 그곳에서 나는 점점 서울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