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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원 Jan 19. 2022

함정에 빠졌다

 취준생이라면 가벼운 우울증은 앓기 마련이지. 학교를 벗어날 시기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은 서서히 지옥으로 빠지고 있었다. 방송국에 들어가겠답시고 스터디를 전전하고 크고 작은 필기시험과 면접에서 떨어지기를 벌써 3년 차. 어느새 나는 'PD 지망생'이라기보다 '취준생'의 행동을 하고 있었다. 관심과 조건이 맞는 곳이라면 어디든 지원하고 봤다는 뜻이다. 심지어 면접 스터디도 열심히 다녔지. 그날도 여느 날과 같은 날이었다. N과 같이 카페에 마주 앉아 자소서를 쓰던. 우리는 자주 가던 스타벅스에 일인용 테이블을 하나씩 잡고 앉아 각자의 노트북에 손을 얹고 목이 빠져라 들여보다가 간간히 대화를 하다가, 샌드위치나 음료를 더 사 오거나 했다. 자소서를 쓰던 N이 툭 말을 던졌다.

  "너는 그래도 목표가 있으니까 다행이지. 나는 그것도 없어."

 저기요. 저는 지금 PD가 아니라 어느 홈쇼핑 회사, 그것도 MD로 자소서를 쓰려고 앉아있는데요. 내 꿈과 전혀 다른 노력을 하면서, 심지어 붙으면 감사합니다 하고 다닐 작정이었으면서 목표라는 말을 들으니 너무 부끄럽다. 부끄러움이 경고등을 울렸다. 무언가 잘못 굴러가고 있다.


 아주 한참 전에 들었던 비슷한 말이 떠올랐다.

 "우리 딸은 그래도 꿈이 있어서 다행이지. 진로 걱정은 해 본 적이 없네."

 휴, 엄마는 휘파람 같은 가벼운 한숨을 섞은 채 말했다. 고등학생 즈음되면 대학을 위한 대강의 방향은 잡기 시작하는 것인지 입시나 교육에 크게 열성적이지 않던 우리 엄마마저 '진로'를 입에 올렸다. 그 말을 하던 엄마의 표정이 무척 편안하고 홀가분해서 그때 알았다. 꿈이 있다는 건 편리한 거구나. 은연 중에 그런 생각도 했다. 이걸 잃는다는 건 걱정하게 된다는 말이구나.

 대학과 전공을 고르느라 헤맬 필요 없이 공부만 하면 된다는 것은 서로 좋은 일이었다. 고등학교 교사인 엄마는 내 입시를 챙기기엔 다른 집 자식들 공부시키기도 바빴고, 하기 싫은 건 죽어도 안 하는 나로서도 엄마의 케어는 별로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꿈은 일종의 안전지대였다. 고민할 필요 없이 한 가지에만 집중해도 좋다는 허락과도 같았으니까.


 꿈은 이정표이자 중력이었다. 작은 불안에도 쉽게 죽음을 떠올리는 내 맘을 잡아둔 것도, 지구 밖으로 튕겨 나가 먼지가 되는 상상을 하던 나를 땅에 붙들어둔 것도 모두 꿈이었다. '춤추는 별을 잉태하려면 내면의 혼돈을 가져야 한다.' 니체의 말은 나를 구원했다. 오해가 쌓여 틀어져버린 친구들, 성질이 불 같은 아빠와 속으로 곪아가는 엄마, 집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밖으로 돌던 밤과 집에서도 이불속으로 숨어버린 밤. 나를 서서히 죽여가던 그것들이 '내면의 혼돈'과 같은 낭만적인 옷을 입고, 나는 '별을 품은 사람'이 되었으니. 내 세상을 허물어버리고 싶은 날에 별을 품은 마음으로 조용히 웅크릴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 모든 밤과 불면이 내가 품은 별을 다채롭게 만들고 있다면 똑바로 응시해주겠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내가 마주하는 고통과 에피소드가 다채로워질수록 내 드라마는 깊어지리라. PD가 되어 내 드라마에 묻은 과거를 풀어놓는 상상을 하며, 그리하여 죽고 싶은 밤이면 나는 내 혼돈을 소중히 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선택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 고민 없이 문과를 선택한 것도 PD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때는 모두가 나를 말렸다. 나는 외우는 일엔 심하게 재능이 없었고 대신 수학과 과학을 잘했다. 누가 봐도 이과에 가야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 것 같았을 거다. 대학이 달리니 공부에 간섭하지 않던 엄마도, 나에게 관심 없던 담임 선생님도, 데면데면하던 수학 선생님도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대학은 이과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방송국 들어가는 데 꼭 문과를 가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런 말은 확신만 더할 뿐이었다. 남들이 말리는 연애는 더 애틋하고 소중해지기 마련인 것처럼. 나는 신문방송학과에 갈 거야. 그리고 PD가 될 거야.


 언제부터였을까. 이 길에서 벗어나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위기감을 느낀 것이. 아주 못된 상대와 연애를 하는 느낌이었다. 그가 주는 환상을 먹고 자라 스스로는 벗어나지도 못하고, 희망 고문만 당하는.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는 것만으로는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걸 알기까지 한 학기도 걸리지 않았다. 일단 PD가 되고 싶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방송에 관련한 수업도 하나도 없었고, 들어갈만한 스터디도 학회도 보이지 않았다. 한 때 PD가 되고 싶었다던 선배들은 '나도 너처럼 그런 때가 있었지' 하며 아련한 투로 지난 꿈을 더듬었다. 회상하듯 떠올리는 저 목소리가 내 모습이 될 수는 없었다. 불안해졌다. 나는 방송국만 보고 서울에 왔는데. PD 말고는 하고 싶은 것도 없는데. 물어 물어 커뮤니티를 찾고, 외부에서 스터디를 구하고 동아리에 들었다. 그래도 조급함은 가시질 않았다. 이것만으로 충분한지 물을 사람이 없었다.

 일단 뭐든 해보자.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뭐든 하기로 마음먹었다. 뭐라도 하면 스펙이라도 남겠지. 기자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었으나 기자단에 들어갔고, 라디오 PD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라디오 AD로 일했다. 드라마 판은 도무지 자리가 나질 않고, 시간만 보낼 수는 없었다. 아무 경험도 없는 것보다야 나을 테니까. 자기소개서에 쓸 수는 있겠지. 이거라도, 저거라도. 없는 것 보다야. 자소서에 한 줄이라도. 그런 마음으로 일을 벌이고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애를 썼다. 내가 안 될 놈 같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뻔하게도, 안타깝게도. 방향을 상실한 채 애쓰는 마음은 불안만 더했다. 진짜 나 이러다 별 볼 일 없는 사람 되면 어떡해? 그래, PD를 꿈꾼 지 15년에 그 꿈을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한 것만 10년이었다. 이제 와서 어떻게 발을 뺄 수 있겠는가. 더 제대로 하지는 못 할 망정. 더 이상 꿈을 꾸는 나는 없었다. 꿈에 배척당하지 않기 위한 날이 이어졌다. 매일을 자기혐오로 앓으면서도 꿈을 놓지 못해 나를 놨다. 방송국에선 여자를 싫어한대. 나약하고 책임감 없다고. 그딴 소리를 들으면 분노하며 욕을 뱉던 나는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일단 붙고 생각해야지. 친구도 놨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열등감이나 못난 나를 들키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다음으로는 이거, 저거. 아무튼 꿈 빼고는 다 놓기 시작했다. 제대로 한다는 건 그런 것인 줄 알았다. 이거 빼고는 다 상관없어, 이런 거. 그 와중에 자기 방어 기제는 착실히도 이어졌다. 온 힘을 다했는데 결국 안 될까 봐, 끝끝내 실패로 남을까 봐. 실은 최선을 다하는 것도 무서웠다. 나는 핑곗거리가 필요했다. 내가 게을러서, 그때 공부를 덜 해서 이런 것이라는 핑계라도. 오늘 못난 나에 대한 핑계를 만들기 위해 최선은 때 맞춰 게을러야 했고 빌어먹을 양가감정은 애쓰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게으름에 대한 현타까지 감당하게 했다.


 열두 살의 내 시작은 진심이었을까. 꿈을 작정했던 열다섯은, 신방과가 아니면 대학에 가기 싫다던, PD가 아니면 무엇도 되지 않겠다던 열일곱의 선택은 최선을 다한 선택이었나. 혹시 애초에 내가 이룰 수 없는 꿈을 이루기 위해 다른 가능성을 다 팽개쳐버린 건 아닐까. 그러니까 어린 조예원은 그저 길이 필요했던 게 아닌가. 안심하고 달릴 수 있는. 불안하기 싫은 마음과 내 취향이 묘하게 섞여 꿈같은 포장지를 입은 것은 아닌가. 그렇다고 해도 이제 와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하면 지금의 나는 대체 뭘까. 피아노를 사랑하고, 수학과 물리에 재능을 보이던. 책을 펼치면 헤어 나오지를 못하던. 작게 반짝이던 어린 10대는 이미 없어진 지 오래인데 10년 넘게 꾼 꿈 하나 감당 못하는 지금의 나는, 진심 하나 짊어지지 못하는 나는 대체 뭐란 말인가.

 스스로가 파 둔 함정에 빠진 느낌. 꿈이 주는 안정감에 단단히 발이 묶여버린 느낌. 발이 푹푹 빠지는 사막을 걷고 걸어봤자 내 사막에는 오아시스의 신기루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 와서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오랜 꿈이란 그런 것이다. 꿈을 지켜온 나에게 지켜야 하는 의리와 책임도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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