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동생이 콜드플레이 공연 보고 온 걸 모르는 첫째를 생각하며
아이가 일반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 고등학생에게 축제의 시간은 없다는 것을.
이 점을 확실히 느낀 건 4월, 콜드플레이가 내한했을 때였다.
아이는 콘서트에 갈 수 없었다. 공연날이 중간고사 열흘 전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물어보지 않았다. 아이에게 "갈래?" 묻는 것만으로도 고민거리를 안겨주는 것 같아서.
물론 물어보지 못했다. 혹시나 "갈래!" 할까 봐.
11월인 지금도 첫째는 아빠와 동생이 콜드플레이 공연을 보고 왔다는 사실을 모른다. 평생 모를 수도.. 있다. 다음 오아시스 공연 티켓팅에나 성공하면 그때 이야기해 줄 수 있으려나. 아마 이 상황은 우리 가족이 입시를 통과하면서 겪은 많은 경험을 가장 상징적이고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될 것이다. 성적과 대학을 목표로 달려가는 길에 멈춤은 없다는 걸 체험해 버렸달까. 실천해 버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그리고 여기서 멈춤은 공부를 하고 안 하고, 적게 하고 많이 하고 등의 실질적인 영역이라기보다, 멈추고 다른 길로 가거나 다른 길로 갔다가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영혼과 마음의 영역이다.
'그러는 너는, 고등학생일 때 축제가 있었냐?'라고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후련하게 중간고사를 마치고, 버스는 보내고 혼자 30분 넘게 걸어 시내 중심가로 가서, 시험 끝나고 꼭 사야지 하고는 일부러 참았던 넥스트 앨범을 사고 집으로 돌아가는 축제.
기말고사도 끝내고 친구랑 또 걸어서 시내 번화가로 가 OO 분식과 XX 분식 사이에서 고민하다 VV 분식집으로 방향을 틀어 매운 떡볶이를 먹고 음료수 마시던 축제.
멋진 친구가 고1 때 결성한 ‘문학클럽’의 멤바가 되어 한국 근현대 문학과 세계 문학을 읽고 독서 토론을 하고 일지로 남기고 가을 억새 보러 시외버스를 탔던 축제. 바닷가에서 운동화 벗고 바다에 발 담그던 축제.
고3 때도 다른 반보다 환경 미화 잘하려고 야자 시간 다 쏟아붓던 축제.
고3인데, 담임선생님이 무뚝뚝하다고 다정함과 관심을 요구하며 학급 간부들이 선생님에게 토요일에 면담을 요청했던 축제.
야자 시간에 화장실에서 큰 일을 보고 있으면 야자 땡땡이친 친구가 학교 근처 유일한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냄비 채 포장해 와 내가 들어가 있는 화장실 칸 앞에서 냄비 들고 떡볶이 식는다며 나오라고 성화 성화 그런 성화가 없던 축제.
만우절 날 수학 선생님께 심한 장난치다 일 년 내내 수학공부만 해서 평균 1등을 하게 된 옆 반의 전설 같은 이야기.
학교 가는 길 옆 꽃밭이 하얗게 소금 뿌려놓은 것 같길래, 소설에 나오는 메밀꽃밭인 줄 알고 "어머나 멋져라~"하며 친구들과 문학소녀처럼 취했다가, 어느 날 아침 싹 베어져 흙만 남은 걸 보고 그제야 무밭인 줄 알게 되어 친구들이랑 "어머나 어이없다~"하며 깔깔 웃던 축제.
... 가 나에게는 있었다고.
30년 전 나의 고등학생 시절에는 시험과 시험 사이 멍 때릴 시간이 존재했다. 그 시간에는 공부했던 나와 공부할 나를 잠시 잊어도 죄책감이 하나 없었다. 주변 환경이 다들 그랬고, 그 환경 안 친구들은 다양한 삶의 모양을 하고 살았기 때문이었다.(친구들은 나에게 배구, 농구, 야구, 아이돌, 클래식 음악, 만화책, 수학, 반항, 페미니즘, 낭만 등을 가르쳤다. 친구의 삶이 연결되어 자꾸만 교집합이 생겨나 내 세계가 자연스럽게 넓어졌다.) 덕분에 시험과 휴식, 열심과 놓음 사이를 리드미컬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수없이 돌아보기를 해도 그 시절만큼 내 인생에서 찬란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청소년기에 공부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삶을 생생하게 살아낸 자부심으로 남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그 시간이 축제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책 <<리추얼의 종말>>을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는 축제가 멈추고, 침묵하고, 관조하고, 그저 듣고, 함께 하는 것이며, 인간의 본질인 집단성을 유지시키고, 목표 없는 놀이라고 설명했다. 동시에 신자유주의 체제가 시작되면서 휴식과 축제마저 생산에 종속시켜 버렸다고 한탄했다. 휴식은 또 다른 생산과 노동을 위한 휴가로 바뀌고, 축제에서는 공동체가 모이고 자연에 감응한다는 신성함이 사라져 버렸다고.
내 아이가 고딩이가 돼서야 특별한 것인지도 모르고 누렸던 그 시간들이 요즘 고딩들에게는 사치임을 깨달았다. 아무리 건강하게 학교 생활을 잘하고 있다 하더라도 입시, 생기부, 수행평가, 시험, 학원 스케줄로 꽉 찬 쉴 틈 없는 요즘 고등학생의 일상은 졸거나 자는 시간은 있더라도 멍 때릴 시간은 없다. 특히 일 단위로 촘촘히 짜여 있는 수행평가는 끊임없이 후회와 자책을 재생산해내는 구조다. 1점 차이로 등급이 바뀌고, 등급이 바뀌면 대학이 바뀌고, 대학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고 세뇌시키는 초경쟁사회에서 학생들은 자꾸 돌아본다. 조금만 더 준비했더라면, 실수하지 않았더라면, 더 잘 외웠더라면, 더.. 했더라면.. 한병철은 앞의 책에서 삶의 시간이 노동 시간과 완전히 일치하면, 삶 자체가 극단적으로 덧없어진다고 했는데, 읽다 보니 입시를 치르는 한국의 고등학생 이야기다. 평가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부족하고 못 하는 존재로 자기를 인식하는.
얼마 전 고등학교 교사 친구가 전해준 안타까운 학생들의 사연을 들은 이후, 나는 더더더 고등학생들이 무조건 짠하다. 그리고 극단적인 초경쟁시대, 초경쟁사회를 온몸으로 통과하는 그들은 무사히 생존하고 자기를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너무 장한 일이 아닐까 감히 생각도 해보았다. 등굣길 차 안에서 곧 질 것 같은 벚꽃을 보며 아쉬워하는 아이에게 "'계절 바뀌는 것을 알아차리고 계절의 상징들을 감각하려고 하는 삶'이면 충분히 괜찮은 삶 아니여?"라고 짠함과 걱정과 대견과 응원을 섞어 섞어 전해 보기도 하였다.
유튜브에서 우연히 보게 된 콘텐츠, 서울대 서어서문학과 박사과의 정기훈 님의 인터뷰는 이런 고민과 생각들에 여러 영감을 주었다. 에콰도르 친구에게 자꾸 실수하게 돼서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하자, 친구가 그랬단다. "에콰도르에서는 사람이 자꾸 실수하면 '쟤가 사랑에 빠져서 그런가 보다. 라고 생각해'" 우리는 실수와 시행착오를 어떻게 바라보는 사회일까. 정기훈 님은 '어떤 패배자에 대해 들이미는 잣대가 한국은 너무 예리하고 너무 잔인하고 다양한 삶의 형태를 받아들일 준비가 없다. 그에 대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는 것 같다.'고 답했다.
출처: 유튜브 <희야기> 중
https://youtu.be/BzmbpDHM4GU?si=9pdwYhynIH7jVY7Y
동료교사 sy쌤이 들려주신 이야기로 마무리해 볼까. 그분은 대문자 T다. 내가 파아란 가을 하늘에 초록 잎, 주황 감 색깔의 조화가 너무 아름답다고 말하자, 본인은 같은 걸 보면서 '아.. 대봉이구나.' 하셨다고. 그 정도로 T다. 그런 분인데, 고등학생 때 학교 운동장 나무 그늘 밑 벤치에 앉아 은단풍 씨앗들이 팔랑팔랑 천천히 떨어져 내려오는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가을 풍경에 대한 추억 하나를 전했다. 나는 저절로 그 이야기를 따라 은단풍 같은 대문자 T 선생님의 18살을 떠올렸다. 그때만 가능한 것들이 있구나. 그런 건 만끽하는 거구나. 그러면 몇십년이 지나도 선명하게 그 시간을 살 수 있는 거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기도했다. 나의 아이들을 포함한 요즘 중고딩들의 하루하루에, 전두엽 스위치 내린 사춘기 시기에만 가능한 마음들이 건너뛰어지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