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나온 엄마가 아이의 가장 큰 방해물이 될 줄이야

자수성가형 잔소리를 조심하시오!

by 김가오리

자수성가한 사람은 위험하다.

자기 성공에 취해 자기 방법에 자신만만하기 때문이다.

자수성가했는데 자기 연민도 크다? 그러면 그로부터 서서히 멀어지자.

자기를 가엾게 여기며 눈물 젖은 자기 서사를 만들어낼 것이다.

여기에다 그 성공 방법을 당신에게 권한다? 그러면 이젠 그로부터 도망쳐야 할 때다.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며 당신을 힘들게 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위험한 사람이(었)다.

저 3가지 조건을 다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형편 어려운 집안의 막내, 엄마는 내가 여상에 가길 바랐다.

언니 오빠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 지방을 벗어나 서울로 가겠다는 욕구,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승부욕의 소유자였던 나의 현재와 미래를, 나만 응원했다. 고3 때였나. 나는 예전과 비슷하게 공부하는데 친구들은 예전보다 더 많이 공부하는 바람에 점수는 비슷한데 석차가 점점 떨어졌었다. 어라? 이대로라면 고향에 남아야 할 수도 있겠는데? 하는 위기의식을 느낀 나는 6개월 정도 다르게 공부했고 그게 통했는지 수능을 잘 봤다. 점수에 맞춰 서울대 사범대학을 갔다. 학과 공부는 의외로 잘 맞았다. 4학년 때 교생실습을 나갔다. 예상치 못한 재미가 있었다. 수업을 잘했고, 아이들도 나를 좋아했다. 자라면서 기대와 인정 결핍이 있었는지 당시 받았던 외부의 인정이 나를 고양시켰다. 다양한 직업 선택지 중에 교사를 골랐다. 다른 선택지보다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는 결과였다. 임용고사를 잘 봤다. 안정적인 곳으로 초임 발령이 났다. 사랑이 넘치는 참교사 소리를 들어가며 십여 년을 근무했다.


써놓고 나니 별 게 아닌데, 나한테는 별 거였던 과거다. 혼자 해 낸 것이라 더 귀했고. 드러내진 않지만 내 자존감의 원천이기도 했다. 결과도 결과지만 과정도 훌륭했다고 평가했다. 노력하면 다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으니, 능력주의 신화가 내재화되고 있었겠다. 역시 드러내진 않지만 오만했을 텐데, 실수하고 실패하는 이들을 이해, 인정하지 못하거나 급을 나누어 선을 긋기도 했을 것이다(추정하듯 쓰는 이유는 부끄럽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히 2019년에 교사 인생의 바닥을 쳤다. 제일 노력을 많이 했는데 제일 큰 좌절을 매일매일 경험했다. 조회, 종례 하러 교실로 올라가면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다행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동안 내가 좋은 교사, 참교사 아니고 잘난 교사의 모습에 만족했었다는 걸 깨달은 기회여서. 평가와 경쟁 세계에서 우위를 점할 때의 나를 선하고 좋고 참된 것으로 포장하고 있었다. 열등의 세계를 경험하고 나서야 내가 나눠 놓은 기준이 얼마나 주관적인지, 위선적인지 알았다. 그동안 쌓아 올린 성공의 증거들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건지도. 돌아보면, 절망의 바닥에서 어차피 바닥인 거 평소와 다른 도전을 해볼 수도 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지금 쥐고 있는 것조차 잃을까 봐. 성인이 된 후 몇 번의 연달은 성공 경험이 너무 소중했던 '자기 연민 있는 자기 성공 방법이 소중한 자수성가형 인간'은 자기의 좁은 울타리를 넓다고 착각하며 안전한 실패만 연거푸 하고 있었다. 멋진 실패라고 스스로를 속이면서.


2019년의 경험으로 교사로서의 삶의 방향은 아주 조금 미세하게 달라졌다. 하지만 나에게는 엄마로서의 자아가 남아 있었다. 엄마로는 아직 덜 컸는지 아이들이 수험생이 되니 자수성가형 인간의 본능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이들이 공부에 대해 털어놓는 고민이나 방법에 대한 질문에 대한 모든 답을 내가 경험했던 나의 방식으로 전달했다. 그게 정답인 것처럼. 더 무섭고 놀라운 것은, 아이들의 노력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 더 오래 할 수 있는데 왜 그만하지? 더 잘할 수 있는데 노력이 부족한가? 조금 더 애썼어야지.. 하는 채근의 생각들. 말로 뱉지는 않았지만 표정으로, 분위기로, 에너지로 전달이 되었을 것이다.


공부 예능 방송 <티처스>를 보고서야 알았다. 내 공부 방식을 아이들에게 권할 때 내 표정이 어땠는지. 고학력자 엄마가 성적이 낮아 고민인 아이에게(사실 엄마가 더 고민스러워 보였음) "엄마는 이렇게 공부했어~ 잘 봐봐~"하며 몇십 년 묵은 자기의 공부 노트를 보여주는 장면이 나왔다. 스스로를 너~무 자랑스러워하는 자기애 가득한 표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 표정이 저 표정이었겠구나 싶었다.


자수성가형 잔소리는 멈춰야겠다는 것은 친정 엄마와 통화하면서 결심했다. 70대 후반의 엄마는 건강 박사다. 새벽에 걷기 운동, 나쁜 음식 일절 안 드시고, 저녁에 근력 운동의 루틴을 매일 지키고 있는 자기 관리의 끝판왕이다. 온갖 건강 방송을 섭렵하고 자기 체질에 맞는 것을 실험해 보며 완성한 엄마의 루틴은 모범적이라 그런 삶의 태도는 딸로서, 인간으로서 배우고 싶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엄마의 생활을 보며 내가 좋다고 느낄 때만 유의미하게 품어지는 마음이었다. 엄마가 몸에 좋은 것들을 나열하며 나에게 권유하는 순간! 그 마음은 너무 쉽게 깨졌다. 짜증과 함께.


생존과 관련해서는 감정이 이성에 앞선다. 엄마가 나에게 한 것은 권유를 가장한 강요일지도 모른다. 내 말이 맞아, 내 방법이 옳아..라는 본심이 숨겨진 강요. 친밀한 사이라 종종 애정이나 관심으로 오해되기도 하는. 하지만 그 안에는 너는 나보다 부족하다는 우월감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걸 느끼는 순간 나를 보호하고 싶어 짜증이 먼저 올라왔을 것이다. 객체가 된 내가 주체의 자리를 찾고 싶어 서둘러 짜증으로 결계를 친다. '거기까지예요, 엄마', '선 넘지 마세요, 엄마'의 다른 표현이다.


엄마 자리에 나를, 내 자리에 아이들을 대입하면 엄마로서의 내 위치와 역할이 조금 더 명확해진다. 여전히 너무 많이 잔소리를 하고 싶은 건 일단 인정! 하지만 조개처럼 입은 꾹 다물기로! 아이 인생에서 아이가 주어가 될 기회를 뺏지 않기로 한다. 주어는 희로애락을 다 경험할 것임에도. 만약 아이가 나의 어떤 면을 본받고 싶어 하는 영광스러운 순간이 온다면, 그것은 말로가 아니라 삶으로겠지. 내가 눈치채지 못한 순간에,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닮아지겠지.


그래서 쓴다. 긴 반성문을 쓰고 있는 것이다.

안전한 실패만 하지 않기 위해,

삶의 좁은 울타리를 지키려고 아등바등거리다 울타리 너머의 불안정하지만 도전해 봄직한 삶을 놓치지 않으려고,

등 뒤에서 아이들이 너머 보며 엄마의 삶이 궁금하면 좋겠어서,

오늘도 나만 알아보는 삶의 경계선을 사부작사부작 흐리게 지워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