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가족은 있을 수 있겠지.
#1.
아침에 일어나 어두운 방 침대 위에 누운 채로 눈부터 만져본다. '이런, 부었네-'
도톰해진 눈두덩이가 손에 잡혔다. 아이 방에 들를까 말까 수십 번을 고민하다 나의 조급증이 못 참고 아이 방문을 열었다. 기분 상한 채로 잠들어 있을 줄 알았는데 아이는 침대 위에 엎드려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눈 안 부었어?(아이는 어제 먼저 울었다.) 엄마는 엄청 부었어.(나는 뒤이어 울었다.) 부은 눈으로 나갈 수 있을까 몰라."
"(눈은 핸드폰에 가 있지만, 손가락은 열심히 눈 주변을 마사지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 눈 가라앉아."
"(화해의 시그널로 알아듣고) 화장하기 전까지 마사지해야겠다.... 00아, 어제 엄마가 마지막에 크게 화낸 거 미안해. 엄마의 진심과 과정이 오해받는 게 싫어 그랬어."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눈도 한 번 마주쳐준다.
이어 어제 얼떨결에 같이 혼나는 분위기가 된 첫째에게 "어제 엄마가 큰소리쳐서 미안해."하고 사과를 건넸다. 감정 조절 못한 어른으로서의 머쓱함과 미안함이 있었다. 그런데 첫째는 "엉? 무슨 큰 소리?? 아.." 하며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아이는 심각하지 않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어쩐지 전날 펑펑 울고 세수하고 방에 들어온 나에게 컴퓨터 기능 물어보러 들른 너의 표정은 너무 평안하더라니. 어떨 땐 세상 예민한 것 같은데 어떨 때는 가족 중 제일 먼저 평안에 들어가 앉아 있는 타입이구나.
#2.
무슨 일이 있어 이랬는고 하니,
일요일 저녁, 오랜만에 네 가족이 함께 하는 식사 시간. 요즘 유행하는 김강우 유튜브를 보며 무수분 수육을 했다. 어머님이 지역에서 제일 유명한 정육점에서 직배송으로 보내 준 돼지고기 목살 부위로 익혀낸 수육과 콩나물 김치 어묵탕으로 식탁은 풍성했다. 현실남매지만 아이들 둘만 이해하는 내용의 대화들도 흡족했다. 아이의 고등학교 선택 이야기로 넘어갔을 때 사달이 났는데, A고를 희망하는 아이에게 B고의 장점을 계속 이야기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엄마, 아빠의 조언을 압박으로 느낀 아이는 말없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우리가 말했다. "A고 만큼 B고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알고 있는지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자꾸 이야기하게 돼."
아이는 말했다. "엄마 아빠가 B고 장점 이야기할 때마다 더더더 A고 가고 싶어 져. A고에 대해서는 먼저 장점 이야기하지도 않잖아. 아침에는 어디를 선택하더라도 죄책감, 부담감 없이 선택하라고 해놓고선 지금 B고로 가라는 거잖아."
아이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겪은 사실은 같았지만 해석한 진실이 달랐다. 어쨌거나 선택에 압박을 느끼도록 한 것에 대해서는 나도 실수였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함을 전했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 아이의 눈물이 계속 우리의 변명과 해명을 가로막고 거부하자 나도 폭발해 버렸다.
폭발한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아이가 오해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바로잡고 싶었다. 아이가 대안학교에서 일반학교로 전학을 결정했을 때 나는 아이가 대안학교에 남아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설득했었지만 아이는 완강했다. 그래서 진학 결정 과정에서는 아이의 욕구를 잘 따라가고 다듬는 정도여야겠다고 마음먹은 지 오래였다. 아이를 위한다는 선택이 때로는 부모에게 "그때 왜 그랬냐"는 화살로 돌아오기도 하기 때문에 조심했던 나여서 아이가 일방적으로 나를 오해하고 여지를 두지 않는 점에 화가 났다. 두 번째는 부모의 조언을 압박으로만 받아들이며 비난하는 것에 대해서는 혼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상의 많은 부분을 부모에게 의지하고 때론 이용도 하면서 이런 결정에서 손을 떼라는 건 소비자 입장에서 부모를 대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침 설거지하다가 분노가 더 커져 버리는 바람에, 울던 얼굴을 세수하고 나온 아이에게 나는 "엄마도 열받는다!!!"며 화와 혼을 뒤섞어 퍼붓고 사과도 받았다.
#3.
일요일 저녁에 이런 일이 있었으니 다음 날 출근하고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일주일 중 월요일이 제일 수업이 적은 날, 여유 있게 일할 수 있는 행복하기만 한 날이어야 하는데 둘째와의 언쟁으로 찝찝한 기분이 남아 행복을 맘껏 누리지 못하는 게 아까웠다. 우울한 기분을 좀 떨쳐 볼까 하여(나눠줄까 하여) 남편에게 우울하다고 sos를 쳤다. '그럴 수 있지'라는 답을 듣고 싶어서. 그런데 남편에게 이런 답이 왔다.
보자마자 의아했다. 왜 "그랬구나~"가 아니지? 원하던 공감의 답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의 생각 회로가 막 헤쳐 모이기 시작하더니 안전부절하던 나의 불안지수가 내려가는 게 아닌가. 나처럼 감정이 상한 게 아니고 아이의 결정이 아직 납득되지 않은 것뿐이라고??? 나와 상대가 다르다는 것이 어떨 때는 징글징글하게 못 견디겠던데, 이번에는 가장 친밀한 타인인 가족들의 다름이 나에게 안정감을 주네? 내가 관계와 감정으로 보고 있는 영역이, 남편에게는 선택과 결정의 영역이었고, 딸에게는 빠르게 회복되는 영역이었으며, 아들에게는 저녁밥 먹은 정도의 영역이었다는 것이 큰 위로로 다가왔다. 내 괴로움의 크기가 다른 이들에게는 그 정도가 아니라면 그 크기를 줄여도 된다고 허락받는 느낌이 들었다.
#4.
문득 모든 상황에 정답이 있는 것처럼 고고하게 괜찮은 건 어쩌면 진짜 우아함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친김에 '우아'의 뜻을 찾아보았다. 사전적 의미는 예상과 같았다. '넉넉하고 온화한 사람의 기품이 맑고 아름다움'. 그런데 한자 풀이가 뜻밖이었다. '근심 곁에 있는 사람'.
근심걱정이 가득 찬 사람 곁에 서서 위로해주는 사람.
근심걱정이 가득 찬 사람을 웃도록 하는 사람.
어라? 근심 곁에 있는 사람???
몰랐던 우아함의 묵직한 의미는 우아하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내게 신선한 영감으로 다가왔다.
혼자만 다 아는 자의 위치에서 나이스하게 해결책을 제시하는 존재가 우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근심걱정으로 자기도 모르게 발을 질질 끌며 무겁게 걸어가는 사람 곁에 그저 있어주는 사람, 조금 더 나아가 위로해 주는 사람, 한참 더 나아가 웃게 해주는 사람이 우아한 사람이라고 오래전 중국인들의 지혜를 빌려 한자가 답했다. 나 하나로는 부족하고 모자라 우아함에 다다를 수 없을지라도, 부족한 각자의 총합은 충분히 우아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각각 1이 채 안 되는 사람 넷이 모였을 때 4가 넘어가는 힘을 발휘하니, 깨닫기만 하면 오히려 남는 장사라고. 모든 것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니 그냥 불완전하고 미미한 존재들끼리 지금을 함께 살라고.
내가 존경하는 어느 교수님은 몇 년 전, 가족의 인연에 대해 "이 조합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생"이라고 정리하셨다. 몇 번을 다시 태어나더라도 우리 가족 넷, 이 조합으로 다시는 살 수 없다는 것. 그러니 상대의 부족하고 답답한 어떤 부분은 전생에 해결되지 않은 것이겠거니 하고 허허- 넘기신다 하셨다. 힘든 일을 겪으신 후에 해주신 말씀이라 가벼이 흘려지지 않았다. 나의 부족함을 허허- 넘겨줄 이들과 지지고 볶으면서 우아한 총합으로 살 기회를 욕망하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
최고보다 최선을,
최선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