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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레MARE Sep 06. 2023

9월의 어느 날에는 노란 국화를

보통의 장례식에서는 흰 국화를 헌화하지만

 기억에 각인되어서 잊히지 않는 숫자들이 있다. 유년기의 집 전화번호, 이제는 다른 곳에 안치되어 계신 조부모님의 예전 납골당 번호, 부모님의 첫 휴대전화 번호, 폐차된 차의 번호판, 어린 시절 자주 놀러 갔던 친구네 집의 동호수, 시절 인연들의 생일이나 전화번호. 이제는 잊어도 되는데, 잊어야 하는데도 잊히지 않는 숫자들이 있다.


 그렇게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는 9월의 어느 날은 그 애의 생일이다. 교복을 입던 시절, 친구가 되고 처음 맞는 그 애의 생일이었다. 우리는 기껏해야 만원 조금 더 되는 용돈을 쥐고 여기저기 즐겁게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뭘 했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 그건 그 애가 불쑥, 단 한 번도 가족들과 생일 초를 불어본 적이 없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자백 같았던 고백만이 기억에 남아있다.


 나는 그날, 함께 나눠 먹으려던 케이크를 그 애 손에 쥐어 보냈다. 이걸로 꼭 가족들과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촛불을 불라고 숙제를 내줬었다. 자기는 숙제를 했다고, 내 덕분에 처음으로 가족들과 생일 초를 불어봤다고 기분 좋게 말했었지. 그때는 그 말을 믿었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 애가 진짜 숙제를 했던 걸까 잘 모르겠다. 자그마한 케이크 하나가, 갑자기 가정에 화목함을 가져다줄 확률은 얼마나 되었을까.


 하지만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우리의 9월은 완전하다. 마냥 신난 친구에게 고백한 불운한 가정사, 조그만 케이크와 숙제, 숙제를 했다며 보인 미소, 숙제를 내줘서 고맙다는 말, 내가 너의 처음을 선물했다는 영원한 기억. 매년 9월 너의 생일이 찾아오고 우리의 이야기를 생각할 때면, 나는 아직도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난다. 때로는 서서히 때로는 가파르게 가까워지고 멀어지고를 반복하다가, 이제는 서로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1년 365일 중 하루, 너의 생일에는 아직도 ‘우리’가 있다.


 9월의 어느 날은, 너의 생일이기도 하고, 연약해서 소중한 ‘우리’의 이야기가 있는 날이기도 하고, ‘우리’가 끝났음을 상기하는 날이기도 하다. 9월의 어느 날은, 중단되어 버린 ’우리‘의 장례식장이다. 가장 빛깔 좋은 이야기를 꺼내보며 웃기도 하고, 끝났음을 받아들이며 눈물을 떨구기도 하는 곳. 그렇게 올해의 조문을 마치며 노란 국화를 헌화하고 싶다. 보통의 장례식에서는 흰 국화를 헌화하지만, 이 장례는 매년 반복될 테니 그에 걸맞게 변주를 주는 것이 좋겠지. 이제는 죽어버린 ‘우리’에 대한, 네게 처음을 선물했던 그날에 대한 짝사랑의 의미로, 노란 국화를 두고 가려고 한다.(노란 국화의 꽃말은 짝사랑, 그리고 실망-이라고.) 너는 내가 두고 간 국화를 볼 수 없겠지만, 원래 장례식이라는 건, 남은 사람을 위한 것이기 마련이니까.



- 당신은 어느 장례식에 노란 국화를 두고 가고 싶은지 궁금한, M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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