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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레MARE Aug 24. 2023

폐허가 되더라도 아주 오래

사신이 가져다준 것

 몇 살까지 살고 싶은지, 종종 지인들에게 묻곤 한다. 21세기의 제임스 딘이라도 되겠다는 건지 반백도 안 되는 숫자를 부르는 사람부터, 진시황 마냥 영생에 가까운 숫자를 부르는 사람까지. 제각각 다양한 숫자들을 부르지만, 결국 그들을 전부 헤아려보면 어떤 형태로든 오래 살고 싶은 사람보다 적당한 나이에 편안하게 떠나고 싶다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났다. 그리고 그들이 부르는 숫자는 지극히 현실적인 연산을 통한 결과였다. 몇 살까지 돈을 벌 수 있을까, 은퇴하기까지 번 돈으로 몇 년이나 버틸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그들이 답으로 내놓은 숫자였다. 초라한 노년은 상상 이상의 불행이고 고통일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주 오래 살고 싶다. 몸이건 정신이건 온전하지 않더라도 나는 그저 오래 살고 싶을 것이다. 불과 5분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해도, 고통과 우울에 염장된 삶이라도 생(生)을 사랑할 것이다. 시간은 기회다. 살아있어야 다음이 있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아주 많은 기회를 주고 싶기에 그렇다. 아주 오래 살면서 나에게 수많은 기회를 주고 싶다. 흔히들 말하는 행복의 범주에 해당하지 않아도 좋다. 겪고 버려지고 울고 무너지고 폐허가 되었다가도, 다시 일어나서 담고 웃고 걷고 뛰고 끝끝내 살아남고 싶다. 심지어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더라도, 바닥을 기면서라도 살아남고 싶은 것이 나의 고집이다.


 사회복지 시설에 봉사활동을 갔던 적이 있다. 그곳에서 사지는 물론 온 마디가 비틀려서는, 휠체어에 앉지도 못하는, 손수레 위에서 웅크려 생활하시는 분을 만났다. 말하는 것도 듣는 것도 온전하지 않으셨다. 감히 그것 만큼은 피하고 싶은 노년의 모습이었다.  마치 사신을 만난 것 같이 그분이 두려웠다. 찾아올 가족도 친구도 없이 맡겨진 존재. 스스로는 움직일 수도 없어 누군가가 때마다 그녀를 돌아눕혀야 했다.

 식사 시간이 다가오자, 음식은 제대로 드실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매체에서 보았던 식사 시중을 내가 들게 되나 싶어, 내심 기대(?)가 되기도 했고. 하지만 짐작이 무색하게, 내가 수레에 식판을 올리자 비틀린 손으로 직접 숟가락을 들어 식사를 시작하셨다. 식사를 끝내시고는 고맙다는 듯 주름을 한껏 잡으시며 웃어주시기까지 했다. 김치는 싫어하시는지 손도 대지 않으셨다. 여전히 호불호가 있고,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고, 타인의 마음에 새로움을 심는다. 여전히, 살아있다. 어느 날 문득 찾아온 사신은 죽음의 공포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생(生)을 돌아보게 했다.


 좋은 것들은 늘 순간에만 머물고 금방 흩어지고 만다. 고대했던 여행지를 가더라도, 긴 비행시간이나 대기시간, 비용, 인파까지 모두 기쁘게 껴안을 수는 없는 것처럼. 고통은 흔하고 값싸다. 우리는 자주 흔들리고 방황하고 불안하고 우울하다. 그래서 편안함과 행복만을 좇아 사는 것은, 순간을 좇아 일생을 낭비하겠다는 소리다. 그래서 나는 내가 행복하기를 소원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여전히 살아있기를 소원하기로 했다.


 나는 내가 행복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행복이라는 파랑새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며 불행이라는 웅덩이를 밟을까, 몸 사리는 삶은 거저 준대도 싫다. 나는 내가 값싼 고통에서부터 남다른 것을 알아내고, 뭔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기를 소원한다. 건강하지 않아도, 마음이 엉망으로 난도질당해도, 불쾌한 늪에서 뭐라도 건져내겠다며 분투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렇게 영원히 살 수 있으면 좋겠다. 행복을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선택한 길, 때로는 주어진 길에서 그 모든 것을 온전히, 영원히 겪어내고 싶다.


- 당신이 몇 살까지 살고 싶은지 궁금한 M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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