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중국어 까막눈 총경리입니다

내 이름 한자 쓰기부터 시작

by 다비드

중국 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단연 중국어였다. 우리 중국 지사가 있는 곳은 소도시라 영어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 일상생활의 모든 것이 중국어로 이루어지기에 업무뿐만 아니라 일상에서의 독립을 위해 중국어 공부가 필수였다. 오히려 업무는 윤경리에게 자연스럽게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일상생활은 스스로 해야 하므로 중국어 회화가 절실히 필요했다.

중국어 공부는 아주 막막했다. 어릴 때부터 한자를 싫어해서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았고, 학교에서 한문 과목은 백지를 낼 정도(...). 고등학교 제2외국어도 당시 대세였던 중국어를 피해서 독일어를 선택했다. 전혀 자랑할 거리는 아니지만 내 수준을 적나라하게 밝히자면, 내 이름도 한자로 쓸 줄 몰라서 필요할 때마다 신분증을 꺼내서 글자를 그리는 수준이었다(...). 한글처럼 형태가 단순하고 활용이 효율적인 문자에 익숙하다 보니, 수많은 글자 형태를 외워야 하는 한자는 처음부터 쳐다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직장 때문에, 먹고살기 위해 한자와 중국어 공부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거주지가 소도시지만 한국 대기업과 협력업체들 때문에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라, 한국인 대상 중국어 과외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이것도 윤경리가 알아보고 구한 것. 한국어를 하는 중국인 선생이 숙소에 와서 1시간씩 주 3회 수업하는 방식이었다. 평생 과외를 받아본 적이 없는데 중국에 와서 정말 다시 미성년자가 된 느낌.

초등학교 수준의 교재를 하나 가지고 같이 읽고 쓰고 짧은 대화를 하는 방식이었다. 처음 배우는 단계라 중국어 성조를 많이 연습했다. 성조가 잡히지 않으면 듣기 말하기 모두 진도가 나가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선생님이 알려줬다. 중국어 성조는 처음이라 정말 어려웠다. 같은 'ma'라도 성조에 따라 '妈(엄마)', '麻(마)', '马(말)', '骂(욕하다)' 등 완전히 다른 뜻이 되니까.

수업이 끝나면 다음 수업 분량에 대한 예습이 숙제로 나오고, 다음 수업 시작 10분간은 예습에 대한 쪽지시험이 있었다. 예습을 부지런히 해야 하는데 가끔 시간이 부족하면 사무실에서 하기도 했다.

Gemini_Generated_Image_dt4dtdt4dtdt4dtd.png 팔자에 없던 중국어 공부를 30살에 시작

과외를 받으면서 막상 중국어 공부를 해보니 생각보다 쉽고 재미있었다는 해피엔딩이면 좋았겠지만, 정말 어렵고 하기 싫었다는 당연한 현실이 따라왔다. 어렸을 때 안 했던 이유가 그대로 떠올랐다는(...). 글자, 발음, 듣기, 말하기, 읽기 모두 어려웠는데, 특히 한자 읽기가 너무 어려워서 몇 달 후 글 읽기는 포기. 문맹률이 높은 국가에서 사람들이 말은 해도 글 읽기, 쓰기를 못해서 문맹이 된다는 게 이해되었다. 중국어 문서는 구글 번역기와 윤경리 도움을 받아 해결하기로. 일상생활과 업무를 위한 중국어 대화를 최소한으로 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다. 몇 달이 지나자 혼자 물건 사고 짧은 여행 다닐 수 있는 정도가 됐다. 하지만 문맹이라 사진 메뉴판이 없는 식당은 못 가는 수준.

간단한 중국어 회화가 되기 시작하고 운전면허도 따고 나니, 일상생활에서 윤경리 도움 없이 독립이 가능해졌다. 혼자 자전거 사서 시내 돌아다니고, 마트 가서 물건도 사고, 운전해서 근교 관광을 가기도 했다. 업무적으로도 출장 항공, 기차 티켓을 중국 사이트와 앱으로 직접 구매하기 시작. 이때 편리하게 이용했던 Ctrip이 현재의 Trip.com으로 커져서 한국에도 진출하고 글로벌 서비스가 된 걸 보니 신기했다.

이 시기부터 중국 생활을 조금이나마 즐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특별히 뭔가를 하는 건 아니었고, 다시 대학생이 된 것처럼 숙소에서 드라마 보고 게임 하고 조깅하고 자전거 타고 그랬다. 다른 주재원들은 친목 모임도 가지고 골프도 배운다는데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았다. 주재원들 모임이나 교회에 몇 번 나가봤는데 어찌나 어색하고 불편하던지.

465445463_9615831878431783_4160914283500338078_n.jpg 자전거 타고 동네 산책하는 게 거의 유일한 주말 외출

새로운 곳에 가서 도전을 하고 인연을 만나고 사업을 키우고 하는 게 진취적인 사업가의 모습인 거 같은데 나는 전혀 그렇지 못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뭔가 변화를 주진 못하고 특별한 사회생활이나 자기계발 없는 여가를 보냈다. 왕좌의 게임 전 시리즈 정주행했던 기억이(...).

일상에서는 어느 정도 독립을 했지만, 중국 지사 업무에서는 여전히 윤경리 의존도가 컸다. 중국어 회화는 늘었지만 아주 기초적인 수준이었고 여전히 복잡한 업무 내용을 중국어로 이해하고 소통하기는 어려웠다. 고무 사업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고, 중국 시장에 대한 지식도 없었다.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뭘 할 수 있는지 갈피를 잡기 어려우니 잡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회사 일에 써먹을 수 있는 토목공학을 전공할 걸", "무역상사 같은 곳에서 일을 해봤으면 해외영업이나 중국 지사 업무에 도움이 되었을 텐데", 이렇게 과거를 되짚으며 답답해하는 시간이 많았다. 앞으로 나아가는 데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생각들.

변화는 없이 고민만 하며 어느새 2015년 연말이 다가왔고 대기업 고객사와 2016년도 연간 계약 준비를 할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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