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총경리님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내년 계약을 따오세요

by 다비드

중국 지사의 유일한 영업처인 대기업 고객사와의 거래 구조는 단순했다. 고객사 설비 유지관리에 필요한 고무 제품을 공장에서 우리 회사에 발주하는 방식. 매년 연말에 차년도 예상 발주 물량과 가격으로 연간 계약을 체결하고, 물량은 공장 상황에 따라 변동 가능하지만 가격은 고정이었다. 내가 부임한 2015년 7월은 2014년 연말에 체결한 연간 계약에 따라 영업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연간 계약을 하고 나면, 우리의 영업 역량보다는 고객사 공장 운영 상황에 따라 그해 영업 실적이 결정되는 구조. 따라서 부임 초기엔 매출 확대보다는 원가 절감에 초점을 맞춘 운영을 계획했다. 그리고 우리 제품을 사용하는 실수요자인 고객사 공장 직원들에게 품질과 납기 만족도를 높이는 것이 곧 영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사업 구조는 매년 연간 계약이 보장되어야 지속 가능하다는 게 가장 취약한 점. 대기업 고객사의 협력업체로서 종속된 사업구조였다.

연말에 마무리지어야 할 2016년 연간계약은 중국지사 2016년 사업 계획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 하지만 윤경리와 나 모두 연간계약은 처음이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막막했다. 우선 고객사 구매부장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상황을 파악하고 대응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민감한 시기에 구매부장과 저녁식사 약속을 잡기 어려울 줄 알았지만 의외로 쉽게 약속이 잡혔다.

뭔가 총경리로서 역할을 해야 할 시점이구나

내년도 사업의 향방이 걸린 연간 계약을 가지고, 고객사 구매부장과 단 둘이 저녁이라니. 총경리로서 영업과 경영 업무를 하는구나. 사무실에서 하는 일이 아니라 중국 지사 총경리로서 거래처와 일종의 담판을 지으러 가는 건가. 이제 겨우 30대 초반인 풋내기가 산전수전 다 겪은 대기업 부장과 상대가 될까.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중국 소도시에는 괜찮은 일식집이 흔치 않다기에 시내에서 그나마 가장 좋다는 호텔 일식당에서 약속을 잡았다.

Gemini_Generated_Image_5nwmgg5nwmgg5nwm.png 풋내기 총경리는 안절부절

만나보니 구매부장이 흔쾌히 시간을 내준 이유가 있었다. 내게 할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우리에게 불리한.

"정총경리, 내년도 계약 건으로 말씀드릴 게 있어서 시간을 냈습니다."

"아, 그러신가요? 말씀하십시오."

"여태까지는 우리가 매년 연간계약을 해왔는데, 이번에는 현지 중국업체들을 포함해서 입찰을 진행하겠습니다."

나는 내년도 계약 물량 확보와 가격 방어를 위해 협조를 구할 목적으로 자리를 마련했는데, 구매부장이 입찰 얘기를 하니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되었다.

"여러 중국업체들이 제안을 해오고 있어요. 단단히 준비해야 할 겁니다."

이건 무슨 소리지? 가격을 내리라는 건가? 우리를 자르겠다는 건가? 본인에게 잘 보이라는 협박인가?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뭘 할 수 있지? 왜 하필 내가 부임하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그 자리에서 더 이상 뭔가 하지 못하고 음식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자리를 파했다. 처음 겪는 상황, 내가 책임져야 하는 큰 문제 앞에서 나는 무력했다.

i3779291655.jpg 씨앗이 발아한다

구매부장을 만난 다음날 윤경리와 둘이 비상대책회의를 했다. 윤경리의 제안으로 협업하는 고객사 공장 기술자들을 통해 경쟁사 정보를 파악하기로 했다. 어떤 업체가 있고, 가격은 어떻고, 품질은 어떤지 파악하고 전략을 수립하기로. 며칠에 걸쳐 윤경리가 조사해 보니 중국업체 모두가 동일하게 가격은 우리보다 상당히 낮고 품질은 좀 떨어진다는 의견이었다. 이를 통해 두 가지 전략을 수립했다.


첫 번째 전략: 품질을 무기로 한 포섭

첫 번째는 우리 제품 품질을 무기로 고객사 공장 기술자들을 포섭하여 구매부에 우리 회사를 강력히 추천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품질 문제를 명분으로 저가 중국업체 입찰 테스트를 거부하도록 하는 것. 실수요자인 공장 기술자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연간계약을 지켜내자는 전략이었다.


두 번째 전략: 최대한의 가격 인하

두 번째는 우리 제품 가격 인하였다. 구매부의 원가 절감 의지는 명확했기에 품질만 가지고 우리 회사에 전체 물량 연간계약을 달라고 하긴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최대한의 가격 인하를 검토했다. 내 부임 전후로 저렴한 원자재를 일부 도입하면서 품질 검증을 진행 중이었는데, 전면 교체하는 걸로 원가를 산정했다. 2016년도 내 급여는 동결하고 나머지 직원들도 인상을 최소화했다. 모든 부분을 탈탈 털어서 10% 남짓의 가격 인하를 준비했다.


두 전략의 목적은 경쟁입찰을 막는 것이었다. 실수요자 기술자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가격 인하로 구매부에게 명분을 주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특히 공장 기술자들의 지지를 확보했다는 보고를 듣고 나와 윤경리는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연말이 지나 2016년이 되었지만 연간계약과 입찰에 대해서는 공지가 내려오지 않았는데, 우리는 이것도 입찰 계획이 수정되는 긍정적인 신호로 여겼다.

'아무래도 우리 전략이 통한 것 같아.'

'기술자들이 구매부에 잘 얘기해 준 모양이야.'

윤경리와 나는 서로 희망적인 추측을 하며 기다렸다. 전형적인 희망회로. 하지만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입찰 공고가 올라왔다. 2016년 1월 11일이었다.

그 순간 모든 희망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이제 정말 경쟁입찰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과연 우리가 계약을 따낼 수 있을까? 우리 중국 지사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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