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해할 시간이 없다
중국 지사의 고무 사업을 접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연간 계약 연장에 대한 희망회로를 돌리고 있던 차라 충격이 컸다. 정말 문을 닫아야 한다는 현실적인 공포가 찾아왔다. 그동안 연간 계약 연장을 기대했던 게 냉정한 분석을 통한 결론이 아니라 희망사항이었구나. 일을 하면서 긍정적인 자세를 갖는 것도 필요하고 객관적인 전망을 갖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긍정적인 자세고 어디까지가 막연한 희망회로일까? 당시의 나는 이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근거가 빈약한 기대를 붙들고 있었다.
결론이 나고 고객사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우리 대신 중국 업체를 선택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5%나 저렴한 가격은 품질 차이를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품질 차이라는 것도 고객사 기술부로부터 듣는 이야기를 토대로 판단한 것인데, 우리에게 호의적인 기술부에서 우리에게 유리하게 피드백을 해주었을 것이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결국 가격과 품질을 종합한 실력에서 중국 업체에게 밀린 것이고, 오랜 기간 동안 일한 협력업체라고 특혜를 기대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관계를 활용하는 영업도 제품의 실력이 갖춰져야 가능한 것이고, 경쟁력이 부족하면 언제든 도태될 수 있구나.
'아, 이게 현실이구나. 정말 냉혹한 세상이야.'
윤경리와 나는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안일하게 생각했는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구매부장이 다녀가고 나서 바로 오후에 현황을 정리하여 본사에 보고했다.
2016년 신규 계약은 없는 것을 전제로 업무를 진행
3월까지 남은 물량을 최대한 출하하여 매출 확보
당초 추진하던 신규 거래처 영업 집중
3월까지 위 계획을 추진하며 고무 사업 유지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중국 지사의 고무 사업을 철수하고 공장 매각까지도 검토한다는 게 지금 생각해 보면 만만치 않은 결정인데, 당시에는 내가 하는 결정의 무게에 대해 잘 모르는 시절이어서 크게 스트레스받지 않고 방향을 결정했다. 오히려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으니 과감한 결정을 할 수 있었던 듯하다.
'어차피 안 되는 사업이면 빨리 정리하는 게 낫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무모했다. 직원들의 생계, 공장과 사무실의 처리 등 고려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였는데 그때는 그런 것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본사에서는 내 방침에 다른 의견 없이 동의했다. 고무 사업이 비전이 없다는 것은 원래 알고 있었고, 현지의 판단이 맞을 것이라는 배경이었다. 고무 사업을 살릴 방법을 찾아보되 답이 나오지 않으면 철수하고 본사 사업의 중국 진출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전화에서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그럴 줄 알았다. 어차피 오래갈 사업이 아니었어.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기획실장님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너무 쉽게 동의를 얻었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다들 같은 생각이구나 하고 넘어갔다.
2015년 연말부터 다른 지역에 신규 거래처를 발굴하여 영업을 추진 중이었다. 1개는 윤경리가 발굴한 항저우 업체, 1개는 본사에서 연결해 준 광저우 업체였다. 거래가 중단된 대기업 고객사와 유사한 공장을 운영하여 동일한 고무 제품을 필요로 했다. 고무 사업 유지를 위한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샘플 테스트와 공급 조건 심사에 임했다. 하지만 우리의 오랜 거래처를 중국 업체로부터 수성하는 것도 실패했는데, 이미 거래처가 있을 다른 지역 고객사를 뚫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뭐라도 해야 했다. 이게 아니면 공장 문을 닫아야 하고 직원들을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가장 어려운 건 중국 직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3월 이후 일감이 없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해야 했다.
"혹시 회사가 문을 닫는 건 아니죠?"
"아니에요. 다른 일감을 찾고 있어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하지만 나와 윤경리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직원들도 그걸 느꼈을 것이다. 특히 생산직 직원들은 더욱 불안해했다. 이들에게는 이 일자리가 생계의 전부였으니까. 나는 총경리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이들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2025년 7월, 2016년에 우리와 작별한 대기업 고객사 공장이 중국 회사에 매각되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30년 전에 설립되어 중국 경제 성장기에 잘 나갔다가, 2010년대 중반부터 중국산 제품의 약진으로 인해 점점 사업이 위축되면서 손실을 내기 시작했고, 결국 본사 그룹에서는 저수익/비핵심 자산으로 판단하고 구조조정 대상으로 결정한 것이다. 한때 우리의 목줄을 쥐고 있던 대기업 고객사도 중국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고 도태되었다. 2016년에 우리를 자른 것도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구나.
영원한 사업은 없고 끊임없이 경쟁력을 갖추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우리만 어려운 줄 알았는데, 사실 모든 기업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이다. 어제까지 살아남았다고 오늘도 내일도 살아남는다는 보장은 없다. 누구라도 언제라도 도태될 수 있다.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