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hua Tree National Park, California
이글거리는 햇살은 자비가 없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마저 증발시킬 기세로. 방문자 센터에 걸린 안내문은 ‘오늘 죽지 마시오’(Do not die today)였다. 오후 4시, 온도계 바늘은 4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차를 타고 국립공원을 돌아보았다. 사진을 찍으려고 잠깐 차에서 내렸을 때, 엄마와 즐겨 다녔던 숯가마 한증막이 떠올랐다. 지글지글 불타는 듯한 공기가 온몸의 세포 구석구석을 자극했다. 따가웠다. 도로 위조차 다니는 차가 거의 없어 적막했다. 한여름의 사막은 텔레비전 리모컨 음소거 버튼을 누른 것처럼, 모든 소리를 지운 것 같았다.
근처 호텔로 가서 짐을 풀고 쉬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은근한 불로 푹 끓인 밥알처럼 흐물흐물 퍼져 있었다. 몸의 열기를 내리고 배고픔을 달래고 수분도 충분히 보충했다. 저녁 8시, 우리는 생쌀같이 단단해졌고 다시 국립공원으로 나왔다. 어느새 공기는 청명했다. 생기를 되찾은 우리처럼, 사막도 활기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멀리서 여럿 동물들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기저기서 지금 이곳에 살아있음을 서로에게 알리는 것 같았다. ‘나 여기 있어. 너 잘 있니? 응, 나 밥 먹는데 너도 올래? ’ 같은. 아침이 온 듯, 그들은 쾌활하게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얼핏 보면 황량하고 버려진 것 같은 사막에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보이지 않는 더 광대한 세계가 있었다. 수많은 동물, 곤충, 식물, 나무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었다. 부족한 물과 뜨거운 기온, 극한의 환경 속에서도 그들만의 방식으로 적응을 하면서. 삶의 최적화를 계속 만들어가고 있었다. 사막은 그들에게 완전한 집이었다.
19살 인생의 갈림길 위에서 나는, 원하는 대학교를 가지 못했다. 절대 갈 일 없을 것 같았던 학교에 후보로 붙었다. 부모님은 재수를 반대하셨다. 독립도 반대하셨다. 시외버스를 타고 매일같이 나의 4시간을 길 위에 흩뿌렸다. 새벽에 눈을 뜨면 학교 가기가 괴로웠고, 근근이 학교를 가면 집으로 당장 돌아가고 싶었다. 내 마음이 쏘아 올린 원망의 화살은 멈출 줄을 모르고 날아갔다. 끈질기게 주변 환경을 탓하며 염세의 동굴 속에 갇혀 있었다.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2년을 낭비한 후에야 비로소. 그 끔찍한 미움의 세상은 내가 직접 만들었다는 걸. 실패할까 봐 무서워서 재수를 포기했고, 혼자 살아갈 용기도, 그럴 경제적 여유도 없어서 집에서 통학했다. 학교생활에 적응하기를 거부했고, 멈춰버린 나 자신을 거부했다. 결국 모든 것은 내가 만든 선택이었다.
내가 원했는지도 모를, 그런 완벽한 환경은 애당초 세상에 없었다. 어떤 환경 속에서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태도가 내게 필요했었다. 그땐 몰랐었다. 열악한 환경조차 내게 우호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결단력과 책임감이 20살의 우울한 나에게 필요했었다는 것을.
사막의 야생동식물은 사람처럼 척박한 환경을 불평하지 않는다. 그저 적응하고 환경에 맞춰 진화할 뿐이다. 뜨거운 더위를 원망하지 않고 땅 속에 집을 만들고, 사막의 열기를 비난하지 않고 다리 길이를 늘이고, 물이 없어 투덜대지 않고 수분 섭취의 효율성을 높이면서. 그들에게 환경은 좋고 나쁨의 평가대상이 아니라, 맞추고 적응해 나갈 포용의 대상인 것이다.
적응을 못하고 도태될 뻔했던 나는 22살에 수용과 진화를 시작했다. 나의 결정으로 만들어진 환경을 받아들였고, 잠시 고장 났었던 나 자신을 받아들였다. 버스 안에서 강의를 들었고, 학교 수업을 진지하게 배웠고, 여러 자격증을 땄고, 아르바이트를 했고, 장학금을 받았다. 내 선택의 결과를 책임지기 위해 결연해졌고, 그 속에서 살아남았다.
처음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별을 본 것은. 밤의 고요, 반짝이는 별빛, 은은하게 선이 드러난 조슈아 나무, 멀리서 들려오는 동물의 조용한 활기. 그 가운데 아름다운 충격을 받고 서 있는 내가 있었다.
사막에 살면서 진화한
모든 생명체에게
치열한 과정을 지나온
그들의 반듯한 의연함 위로
은하수 별빛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