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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음의 바다 Jun 04. 2024

백 원의 가치

Grand Canyon National Park, Arizona



알고 있는 줄 알았다. 여기저기서 많이 들어봤고 많이 봐왔다. 오래전 친구들과 직접 온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이곳은 대체 어디인가. 나는 그랜드 캐년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알고 있다고 생각해 온 걸까. 완전히 다른 곳에 완전히 다른 내가 서있었다.


어째서 나에게 새로워진 걸까. 나는 어떻게 달라진 걸까. 엄마가 되었고, 나의 가족이 소중해졌고, 사소한 것에도 감사하게 되었고, 나의 끝을 보기 시작했고, 내가 붙잡고 싶은 모든 것이 찰나의 꿈같이 지나간다는 걸 알아챘을 뿐인데. 이제야 내 시력에 딱 맞는 안경을 낀 것처럼, 나는 비로소 그랜드 캐년이라는 곳을 처음으로 제대로 보게 된 것 같았다.





여름 햇살은 뜨겁게 내려쬐고 있었다. 나는 오늘 많은 걸 하지 않을 참이었다. 이 광막한 캐년 앞에서 뭘 어떻게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말문이 막히는 대로, 최면에 걸리듯 멍해지는 대로, 슬로 모션 영상처럼 움직이기로 했다. 딸아이와 남편의 손을 잡고. 마서 포인트(Mather Point) 부터 차례대로 전망대를 다니며. 붓으로 점 하나 찍어 한지에 먹물이 퍼져나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는 마음으로.





나는 원자처럼 작았다. 5-6백만 년의 시간과 콜로라도 강이 조각해 온 거대한 작품 앞에서 나는 그저 한 줌의 티끌 같았다. 길고 긴 시간과 많은 양의 물이 한 땀 한 땀 여길 만들었다. 캐년이 만들어지면서 18억 4천만 년 전에 형성된 가장 오래된 지층까지 드러나게 되었다. 깊게 패이는 얼굴 주름 너머에서나 볼 수 있는 유연한 현명함처럼. 인고의 세월이 겹겹이 쌓여야만 드러나는 우아한 지혜처럼.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없었다. 캐년에는 인내와 끈기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나는 부끄러워졌다. 매일 명상을 시작하다가 포기한 일. 우쿨렐레 연주를 독학하다가 포기한 일. 읽고 싶었던 책이 어려워 포기한 일. 내가 쌓아놓은 포기의 더미 앞에서 난 먼지처럼 작아졌다. 노력의 빗방울이 부족했을까. 고집의 암석이 너무 단단했을까. 나의 계곡은 깎이지 않았고, 나의 시간이 쌓인 지층은 드러나지 않았다. 나는 아직 다양한 색깔의 인내를 차곡차곡 쌓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국립공원 안 숙소에 짐을 풀고, 노을을 보러 나갔다. 저 멀리 지평선 위에서 뜨거운 해가 하늘을 화려하게 불태우며 넘어가고 있었다. 캐년의 다채로운 빛깔도 해를 따라 춤을 추었다. 우리는 숨죽여 지켜보았다. 땅거미가 완전히 내려앉을 때까지. 햇살이 떠나며 기온은 급격히 내려가고 있었다. 한기가 들었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사라진 다른 차원의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진공 속처럼 고요했다. 배경이 연기처럼 날아가고, 주변 사람들도 지워지고, 내 몸도 사라지고.


내 영혼만이
투명한 물방울처럼
백지 위에 남아 있었다.








드디어, 콜로라도 강을 만났다. 그랜드 캐년 계곡의 시작인 글랜 캐년 댐(Glen Canyon Dam) 전망대에서. 강은 깎아지른 절벽 사이를 굽이 굽이 흐르고 있었다. 유유히 느긋하고, 여유롭게 평화로웠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럼에도 강은 힘들었을까. 흘러가다가 암벽에 부딪힐 때 아파했을까.





나는 길을 가다가 때때로 힘들었다. 장애물을 만나면 아팠었다. 난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데. 청록빛 강물은 차분하고 절제된 표정으로 묵묵히 흘러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기나긴 세월을 생각했던 건 아니야. 그저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이야, 라고 말하는 듯했다.


내가 오래 산다면 백 년이 될까. 캐년이 살아온 건 5-6백만 년. 협곡이 만들어진 그 긴 시간 앞에서 나는 반짝 불타오르다 바로 꺼지는 촛불과 같다. 5백만 년 앞에 백 년이란, 5백만 원 앞에 백 원처럼 초라하다. 그럼에도 나는 백 원의 가치를 생각해 본다. 내가 가진 백 원의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나의 남은 시간 동안 내가 할 일이 아닐까.


나는
백 원으로
무엇을 남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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