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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음의 바다 Jun 19. 2024

물과 바위 같은 사랑

Wire Pass Slot Canyon, Utah



울퉁불퉁 비포장길로 들어섰다. 차량정비소 아들이자 자동차 부품 연구원이었던 남편의 예민모드가 활성화되었다. 우리는 승용차를 타고 있었고 사륜구동이 아니었다. 덜컹거리며 거북이처럼 가는 동안, 행여나 작은 돌이 차에 튈까, 충격흡수장치(흔히 쇼바)에 무리가 갈까, 남편은 노심초사였다.


놀라울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에서, 와이어 패스 트레일(Wire Pass Trail)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셋은 안전하게 도착했음에 안도했다. 차가 고장 나면 여행에 차질이 생길 수 있으니 나도 같이 걱정하긴 했지만. 내심 포장이 안된 길이 반가웠었다. 이만큼의 땅이라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서. 이 길이 계속 비포장으로 남아있길 바랐다. 나 혼자 마음속으로.


11월의 하늘은 높디높았다. 구름 한 점 없이 짙은 파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속담 속에 등장하는, 딸 내보낸다는 가을햇살이 내리쬐는 맑은 날이었다. 하늘 아래 활짝 열린 길은 따사로운 햇빛을 받기에 좋았다. 내 옆에서 걷고 있는 나의 딸을 보았다. 그녀의 손을 잡고 걸을 수만 있다면 나는 봄햇살이든 가을햇살이든 아랑곳 않고 마냥 좋을 것 같았다.





크고 작은 돌들이 트레일 옆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 주변을 커튼처럼 거대한 암석이 에워싸고 있었다. 누군가가 지점토 찰흙을 만지작 거리며 세세히 줄을 그어 무얼 만들려다가, 찰흙이 그대로 굳어버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연노랑에서 황토색을 지나 붉은 갈색 사이 모든 농도의 빛깔을 만들어 내고서. 거인이 만드는 미니어처 세상 속에 작은 피규어 같은 우리가 걷고 있었다.


비가 올 땐 여길 들어올 수가 없다. 우리가 걷는 트레일이 물길이 되고 강이 되기 때문에. 특히 좁은 캐년 안에는 아주 적은 양의 빗물로도 위험하다고 한다. 물이 없는 강바닥을 걷는다는 게 신기했다. 살면서 보아왔던 강이라는 곳은 항상 물이 차 있었으니. 비가 오는 날과 오지 않는 날에 따라 강으로 변신했다가 다시 흙길이 되는 이곳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그 오묘함으로, 걸을 때 일어나는 흙먼지도 참을 수 있게 되었다. 쉬엄쉬엄 걷다 보니 우리가 기대했던 캐년이 나타났다.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 같았다. 세계에서 가장 길고 깊은 캐년 중에 하나였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식상 하리만치 익숙한 명언이 이제야 내 마음속으로 뚫고 들어왔다.


커다란 바위 한가운데 구멍을 뚫고 길을 내고 협곡을 만들어 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캐년 속으로 들어갈수록 협곡은 점점 깊어졌고, 점차 작아진 우리는 작은 조약돌 세 개가 되어 물길을 따라 굴러다녔다.





정오의 햇살이 마법을 부렸다. 캐년 속 구석구석 들어와 춤을 추는 햇빛은 붉은 바위를 층층이 다른 빛깔로 물들였다. 마침내 황금빛으로 캐년 속을 환하게 밝혔을 때, 내 마음도 같이 물들었다. 황홀했다. 내 앞에 걸어가던 딸아이는 황금색의 대가, 클림트 작품 속의 뮤즈 같았다.






형체가 있는 바위가 있었다. 모양이 없는 물이 있었다.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던 바위에게 누군가가 똑똑, 다가왔다. 물이었다. 처음엔 귀찮기도 했다. 가만히 있고 싶었다. 똑똑똑, 물방울은 계속 찾아왔고, 바위는 점차 물이 편해졌다. 그렇게 마음을 열기 시작하자, 바위의 몸에 구멍이 생겼다. 재미있었다. 곁을 내주면서, 바위는 틈이 생기고 갈라졌다. 사실, 물도 즐거웠다. 바위와 있는 동안 형체가 생기고 모양이 생기니까.


부드러운 색감과 결이 생겨난 바위는 처음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달라졌다. 물방울도 춤을 추듯 길고 긴 물줄기로 변했다. 그 큰 바위와 작은 물방울이 이토록 놀랍게 바뀌게 된 건, 다름 아닌 서로의 다정한 손길이었다. 물과 바위는 마주 보며 웃었다. 곁을 주고 결을 맞추며 같이 보낸 시간을 끌어안고서.


나도
남편과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

물과 바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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