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맑음의 바다 Jul 09. 2024

느릿느릿 시간은 달팽이였다

Monument Valley Navajo Tribal Park, Navajo Nation / Arizona



우리에게 2시간이 주어졌다. 붉은 흙먼지를 날리며 17마일 비포장 도로를 따라 천천히 달렸다. 기념비 같은 돌기둥이 있는 곳마다 멈춰 섰고, 그때마다 우리는 고독의 자연 속으로 들어갔다. 공원 입장 순간부터 시간을 잃어가고 있었다. 모래시계 속 모래는 성실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럼에도 공원 안의 시간은 멈춘 듯했다.


인류가 출현하기 전, 저지대였다. 수억 년 동안 퇴적물을 착실하게 쌓다가 융기하였다. 분지였다가 고원이 되었다. 그 후 5천만 년 동안 바람과 물은 고원을 끊임없이 깎고 쓸어내리고 다듬고 벗겨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아마도
인간이 사라질 그 이후에도.





진파랑의 하늘과 붉은 모래암 조각뿐이었다.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한, 내 눈이 닿을 수 있는 저 멀리까지 모두 자연이었다. 포장도로, 가로등, 신호등 따위 없었다. 내가 목격한 인위적인 것은 나무로 만든 작은 표지판, 안전을 위해 설치된 난간 몇 개가 전부였다.


나바호 부족이 이곳 모뉴먼트 밸리를 지키는 방식은 굳건했다.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느린 듯 결연하게 지켜내고 있었다.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모든 유혹을 뿌리치면서. 시간제한을 두고 예약 관광객만 들어가게 했다. 도로를 포장하지 않았고 길을 더 만들지 않았다. 조명을 설치하지 않았고 숙소를 더 크게 짓지 않았다. 적막한 광활함 위에서 나는 뭉클해졌다.





”지금 그 모습 그대로 예뻐.“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은 늘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뭐가 예쁘다는 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수능 준비로 초췌해져 가는 우리에게. 교복에 갇혀 여드름 자국이 늘어나는 우리에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유를 느꼈다. 화장을 했고, 머리 염색을 했고, 귀를 여러 개 뚫었다. 안경을 벗었고 컨텍트 렌즈를 꼈다. 잡지책을 보며 유행하는 패션 스타일을 쫓았다. 선생님이 틀리셨다고, 이렇게 해야 예쁜 거라고 알려드리고 싶었다. 내가 얼마나, 완벽하게 틀렸는지를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 선생님은 18살이 가진 순수한 가치 그대로 우리를 알아봐 주셨다. 무한한 시간 속에 본연의 모습을 간직해 온 모뉴먼트 밸리처럼.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그래서 더 고결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바호 부족이 이 위대한 바위 조각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여기서 무얼 더했다면. 상상만 해도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기나긴 세월 꿋꿋이 지켜온 본디 타고난 아름다움이 진흙 속에 찾은 진주처럼 반가웠고 애틋했다.


모래암 조각 중 유명한 2가지는 서쪽과 동쪽 벙어리장갑(West and East Mitten Buttes/Mittens)으로 불렸다. 그 모래바위 산은 한 쌍의 달팽이가 되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시간이 천천히 돌아가는 곳에서, 아늑한 집을 등에 메고서. 느리지만 묵묵히 나아가는 달팽이는 이곳에 잘 어울렸다. 그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까.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 포레스트는 3년 2개월 동안의 달리기를 여기서 멈추었다. 모뉴먼트 밸리를 배경으로 163번 도로 위에서. 시간이 흐른 후, 첫사랑 제니에게 편지를 받고서 그는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돌고 돌아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포레스트와 제니는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보았고, 아주 느리게 서로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들은 모뉴먼트 밸리의 두 마리 달팽이를 닮았다.




공원 안 캐빈에서 본 달팽이 두 마리는, 이미 함께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짜장면이 좋아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