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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음의 바다 Jul 31. 2024

마법사의 새에게 길을 묻다

Crater Lake National Park, Oregon



나무는 푸릇했고 길은 한적했다. 크레이터 호수 국립공원으로 가는 일 차선 도로였다. 불현듯 500m 전방에서 작업복을 입은 사람 두 명이 도로 위로 나타났다. 알싸한 예감이 왔다. 그들은 길을 막기 시작했다. 바로 우리 눈앞에서. 가까이 가서 물어보니 도로 보수로 2시간 통제된다고 했다. 이 길을 피해 돌아가는 길이 있으나 여기서 2시간 기다려 가는 것과 시간은 비슷할 거라고 그들 중 한 명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두 사람은 유유히 사라졌다.


도로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우리는 당황하여 얼음처럼 굳었다. 우리가 5분 전에 왔다면 지나갔을까.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것보다 5분 뒤에 왔고 2시간 뒤에나 이 길을 지나갈 수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든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2시간을 어떻게 보낼지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찌 보면 4시간이 아닌 게 다행이었다. 2시간 뒤에 가면 방문자 센터가 문 닫기 전에는 도착할 수 있고, 딸아이가 주니어 레인저 프로그램을 참여하여 배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해가 충분히 떠 있는 시간이고 우리가 호수를 즐길 여유가 어느 정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면 되었다.


마침 우리가 멈춰 선 도로 옆으로 공터가 있었고 나무 그늘이 넉넉했다. 우리는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려 다리를 펴고 기지개를 켰다. 맑은 공기를 마셨고 새소리를 들었고 풀냄새를 맡았다. 배가 고파 근처 가게에서 샌드위치를 사 와서 먹었다. 우리 뒤로 온 다른 차들도 차례대로 이곳으로 모여들었고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항의하거나 불평하며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여름 나무그늘 아래
우연히 같은 시간에
모인 사람들.

초록잎사귀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처럼
모두가 평화로웠다.


2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는 데 이곳을 떠나기가 아쉬울 뻔했다.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환한 미소와 함께 인사를 했고 그렇게 꿀맛 같은 휴식이 끝이 났다. 약속이나 한 듯이 같은 시간 같은 곳에 머물렀다가 각자 갈 길을 떠났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호수인가. 눈이 부셨다. 짙은 파란색의 가을 하늘 같은 크레이터 호수는 여름 햇살 아래 잔잔했다. 우리는 주술에 걸린 듯 멈춰 섰고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웅장한 고요함에, 담백한 차분함에 그 끝을 모른 채 빠져들었다.


약 7,700년 전 마자마 화산의 붕괴로 깊이 655m의 거대한 칼데라가 형성되었다. 그 후 대략 720년이 걸렸다. 오직 눈이 녹은 물과 빗물이 모여 깊이 594m의 호수가 만들어지기까지. 2m도 안 되는 한 낱 인간인 나로서는 그 깊이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마천루 Top 10 안에 들고 한국의 최고층 건물인 롯데월드타워(지상 123층, 555m)가 이 호수에 퐁당 빠질 수 있는 깊이인 것인가.


미국에서 눈이 많이 오는 곳 중에 하나였다. 기나긴 시간 오직 순수한 물만이 찰랑찰랑 차올라온 호수. 어떤 강물도 흘러 들어오지 않고 어떤 강으로도 흘러나가지 않는, 하늘이 내려준 물만 차곡차곡 받아온 곳. 깨끗한 투명함이 겹겹이 쌓이고 쌓여 새파란 고요가 되었다. 우리가 오늘 이곳에 오기 위해 2시간을 기다렸던 건, 호수에 새겨진 시간의 속도에 맞춰가기 위함이었을까.





둥글고 거대한 크레이터 호수는 싱잉볼처럼 테두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면 아름다운 울림이 날 듯했다. 은은히 오랫동안 진심을 다해 울려 퍼트려줄 것 같았다. 상냥한 미소와 같은 진동으로 평화를, 사랑을, 위로를. 호수 저 깊은 곳으로 내 마음을 비춰 보낸다면 심연에서 다정하게 응답을 해주지도 않을까. 어른으로 살면서 지친 마음, 인간관계에 부딪혀 긁힌 마음을 엉킨 실타래 풀듯 한 줄씩 당겨 풀어 보내면, 긴 세월 오롯이 버텨낸 푸른 호수는 나에게 그저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해줄 것 같았다.






호수 한가운데 우뚝 솟은 위저드 섬(Wizard Island)은 파란 하늘에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날아가는 한 마리의 새였다.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데, 이 마법사의 새는 알고 있을까. 내비게이션의 도움으로 호수로 오는 길은 찾아왔지만, 내 인생의 길은 그 누구도 알려줄 수가 없다. 그러기에 나는, 온전히 오늘에 깨어있어야 하고 내일을 살아내야 한다.


그리하여 나는

마법사의 새처럼
날개를 활짝 펴고 나아갈
용기를 얻고서

오늘의 길을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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