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시간이 찾아오면, 별이 떠오른다.
그녀는 미국에서 만난 나의 선생님이었다. 나의 할머니이기도, 엄마이기도 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였다. 나는 그녀의 집에서 보내는 시간을 사랑했다. 싱그러운 자연을 품고 있는 뒷마당 테라스에 앉아, 고풍스러운 커피잔에 한국 믹스커피를 마셨다. 갈색 털이 윤이나는 개는 하품을 하며 탁자 밑에서 잠을 자곤 했다.
우리는 밤을 사랑했다. 세상이 잠든 그 고요 속에서, 그녀와 나는 인생을 쓰고 영혼을 답했다. 우리의 밤들은 빛나는 별처럼 이어졌다. 어느새 나의 메일함에는, 그녀와 주고받은 Re:Re:Re:로 이어진 답장들이 겨울밤 눈처럼 소복이 쌓여갔다.
이번 생의 기억 너머, 아주 오래전에 그녀를 만난 것만 같았다. 그곳은 내가 태어나고 그녀가 사랑한 한국이었을까. 그녀의 조부모가 태어나고 내가 동경한 아일랜드였을까. 잠잘 때 눈을 감는 것만큼 자연스럽게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내가 영어로 말하는지 한국어로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해 여름, 나는 13개 주 자동차 여행을 떠났다. 매일 밤, 아이와 남편이 잠든 후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그녀가 내게 부탁한 건 단순했다. 가는 곳마다 찍은 사진을 첨부하고 어디인지 적어서 메일을 보내는 것. 그러나, 내밀하게 깊은 밤은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대자연이 만들어내는 감동의 블랙홀이었을까. 마음속에 맴도는 감정을 헤집고 단어를 하나씩 집어 올려, 문장으로 풀어내지 않을 수 없었던 밤들이 이어졌다.
여행 기간 내내 그녀와 나는 서로의 메일을 기다렸다. 같은 장소에 녹아든, 그녀의 오래된 이야기와 나의 새로운 감성이 만나 밤하늘의 은하수가 되었다. 낯선 길은 편안해졌고 여정은 더욱 풍성해졌다. 각자의 몸은 다른 곳에 있었지만, 그녀는 분명 우리와 함께 있었다.
여행을 다녀온 뒤, 퍼즐조각처럼 흩뿌려졌던 내 마음을, 여행기 속에 하나하나 다시 맞춰 담았다. 프린트하여 링으로 묶은 글들은, 마침내 하나의 책이 되었다. 그녀는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좋아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꼭 ‘출판’하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누가 읽기나 할까 싶어 머쓱해졌으나, 그녀의 눈빛은 진심으로 반짝였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시간은 착실히 흘러갔다. 브런치 작가가 된 어느 날, 묵은 빨래를 하는 심정으로 그 여행기를 끄집어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막막했다. 직역하듯 한글로 바꿔 써봤더니, 얼룩이 덜 빠진 티셔츠 같았다. 두 팔을 걷어붙이고, 비누칠을 하고 힘차게 문질렀다. 땀인지 눈물인지 헷갈리는 물방울과 셀 수 없는 밤의 시간을 더했다. 헹굼을 끝내고 햇빛에 말려보니, 가끔은 입고 싶은 옷이 된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나는 그녀와의 추억이 장면마다 스며든 글들을 모아 브런치북으로 ‘발간’하기에 이른다. 그녀가 말한 출판이 이것이었을까. 나는 당장 그녀에게 메일을 쓰고 내 브런치북 링크를 보내고 싶다. 그녀는 번역기를 돌려가면서 내 글을 읽고 사진을 다시 보며, 달빛과 같은 우아한 감탄을 늘어놓을 것이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다. 누구에게라도 자신이 가진 무한한 빛을 나눠주는 사람. 그 반짝임으로 보는 사람도 더 밝아지고 싶도록 만드는 사람. 밤하늘의 별 같이 마음이 눈부신, 그런 사람.
2년 전, 그녀는 별이 되었다. 나는 되돌아오는 이메일을 우두커니 바라볼 뿐, 할 수 있는 게 없다. 여행을 다니며 찍었던,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별 사진을 자꾸만 꺼내어 본다. 그녀와 나눈 대화들이 밤하늘의 빛이 되어 무수히 쏟아져내린다.
고요한 밤은 나를 은밀한 어딘가로 데려간다. 무한한 공간 속에서, 익숙한 나와 헤어지며 밤을 닫는다. 별이 쏟아지는 우주 어딘가에서 그녀를 만난다. 그녀의 맑은 영혼을 다시 만나, 나도 덩달아 빛이 난다. 그곳에서 우리는 그동안 밀린 수다를 떨고 믹스커피를 함께 홀짝인다. 갈색 털이 부드러운 개도 우리의 곁에서 하품을 한다.
밤은 어둡지만, 별은 밝다.
나는 이제 헤어짐을 견디는 법을,
그리움을 쌓아가는 법을,
반짝이던 그녀와 같은 별에게 배운다.
이 책이 조금이라도 따스하다면, 그건 모두 그녀가 내게 준 것이다. 어둠 속에 있던 내 인생에 지지 않을 빛을 밝혀준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온기를 나눠주고 싶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그녀에게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