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류
지금이야 냉동 핫도그 하나 새벽배송 시키는 건 일도 아니지만 어릴 때 핫도그는 먹기 힘든 귀한 음식이었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 집에서 해 먹을 수 있는 떡볶이를 분식집에서 산다는 것 만으로도 사치인데 널찍한 떡볶이 팬 옆의 통통한 핫도그를 사이드로 고르는 건 말이 안 됐다. 아이들 있는 집에 빈손으로 올 수 있냐며 기름으로 반질반질해진 종이에 담긴 핫도그를 들고 손님이 오신 날, 나는 손에 쥔 핫도그의 케첩 먼저 핥아먹고 그다음엔 겉 부분의 빵을 살살 긁어 먹고 마지막에 아끼던 소시지를 남겨 먹었다.
학교에서 점심 급식시간에는 급식판 위에 가지런한 음식들 중 밥과 채소와 국까지 모두 먹은 후에야 아껴 두었던 메인 반찬을 한입에 꿀꺽 삼켰다. 빠알간 제육볶음은 어리석게 짰다.
중, 고등학생 때는 문구류가 그렇게 좋았다. 형형색색인 볼펜들과 동그마니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자와 가위, 지우개 따위는 내가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사치였다. 아버지는 ‘모은 볼펜으로 대학을 갈 수 있는 거라면 넌 하버드도 가겠다.’며 야단이었다. 나는 귤보다는 진하고 오렌지보다는 흐린 색의, 시트러스 향이 날 것만 같은 그 무언가의 색에 끌려 당시 가장 인기였던 ‘하이 테크’의 주황빛 볼펜을 샀다. 진짜 진짜 중요한 날에만 써야지. 진짜 진짜 좋았던 일을 일기장에 적을 때나, 진짜 진짜 좋은 물건에 내 이름을 새길 때만 쓸 거야.
그렇지만 특별한 재주도 뛰어난 외모도 없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학생의 청소년기가 그렇듯 그 ‘진짜 진짜 좋은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공책에는 아까워서 못 썼고, 회색빛 갱지의 학습지 위에는 주황색이 잘 보이지 않아 못 썼다. 내구성을 유일한 단점으로 가졌던 내 시트러스 하이테크 펜은 절반도 쓰지 못하고 단 한 번의 책상 추락으로 즉사했다. 그 즉사한 펜을 버리기 아까워 직장 생활을 할 때까지 가지고 있었다.
아끼던 것은 물건뿐만이 아니었다.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는 걸 아프게 깨닫고 나서부터는 누군가에게 푹 빠져들면 사랑이 빨리 꺼질까 해 마음을 주는 데도 몸을 사렸다.
갯가의 개흙처럼 나를 아무리 꽉 잡아 뒤흔들어도 기어코 그 사랑에서 빠져나오려고 애를 썼다. 들뜨지 마. 설레지 마. 너 이럴 때 아니야. 나를 채찍질 하면서 ‘사랑한다’는 말을 아꼈다. 상대가 사랑한다고 아무리 말해도 절대 말해주지 않았다. 진짜 중요한 순간에만 말해야지. 완벽한 장소에서 완벽한 날씨에 완벽한 상황이 오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이것뿐이었다. ‘나도.’
그러나 사랑에 발갛게 달뜬 밤들은 흐르는 시간과 좋지 않은 상황에 무색히 흘러갔다. 평생 두근거릴 것이라고 예상하지도 않았건만 어떤 폭풍우가 닥쳐도 상대를 사랑할 것이라는 열렬한 믿음을 가진 내가 이렇게 흔들리다니 내 모습이 나도 적응이 안됐다. 우리에겐 애정인지 미련인지 모를 삼삼함만 남았다.
아끼던 물건을 채 다 쓰지도 못하고 비우고, 마음껏 사랑해보지도 못한 채 이별까지 고민하게 되면서 그렇게도 아껴왔던 그 수많은 날들이 부질없고 어리석었다는 걸 알았다. 가장 빛나고 설렐 때 충분히 품고 사랑해 볼걸.
볼펜도 사랑도 가장 필요한 때에 적절히 써도 충분하고, 시간은 절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걸 이젠 안다.
이젠 서로가 어색하고 쑥스러운 말이지만 예쁜 볼펜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적어 봐야겠다.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대로이다. 마음이 밍밍해진건 나일 뿐.
어린 날의 나에게도 이렇게 말해줘야지. 제육 볶음은 아끼지 말고 밥이랑 같이 싹싹 비벼 먹어봐. 더 맛있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