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71세 대표님! 나 좀 죽여주십쇼!(2)
8. 71세 대표님! 나 좀 죽여주십쇼!(2)
“아버지! 어머니?”
순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야, 꿈이잖아. 아버지가 날 흔들어 깨우시고. 음. 혹시 오늘이 내 재산날? 에휴~ 아버지, 죄송합니다. 울지 마세요. 저 같은 애 때문에 울지 마세요.”
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천국에 가신 부모님은 분명히 내가 이 세상에서 잘 살길 바라실 텐데 오히려 나는 가고 싶으니, 부모님 입장에서 얼마나 속상해하실까.
고개를 푹 숙였다. 부모님이 이러시면 내가 어떻게 죽어.
“웁~ 웁~”
또 그 소리다. 고개가 바로 정신을 차렸다. 내가 살려면 저 소리를 모르는 척해야 할 것만 같았다. 파고들었다간 비서에게 잡혀 바로 저 신세가 될 수 있으니. 하지만 죽을 거면 저 소리를 따라가야만 했다. 그래야 저 신세가 된다.
“뭐야? 이거냐! 저거냐! 결단해!”
‘부자 할방구에게 일이나 부탁해 봐. 부자니까 뭐라도 들어주겠지. 옷까지 맞춰주는데 일자리라도 못 줄까?’
‘그러지 말고, 저 소리를 찾아내.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 수도 있잖아.’
‘부모님을 위해서 살아야지. 꿈에서까지 나오셨잖아. 그냥 가만히 있어. 모른 척 해! 너부터 살아야지.’
‘죽을 거면 죽을 결심으로 저 소리를 따라가.’
어떤 생각이 선이고 어떤 생각이 악인지 모르겠다. 헷갈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땐 이렇게 하면 된다.
“마이나스….”
통장잔고를 보면 된다. 나는 침대에서 살포시 일어나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 방을 탈출했다.
“10층, 읍!”
나는 내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말’이 나오려고 하길래, ‘생각’으로 하자고 타협했다.
‘큰일 날 뻔했네. 공포에 떨며 죽긴 싫어. 죽어도 당당히 죽고 싶다고. 그래! 씩씩하게 저 소리를 찾는 거야!’
허리를 굽힌 상태로 여기저기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걷다가 나 자신을 설득한 뒤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걷기 시작했다. 먼저 이 소리의 종착지로 제일 유력한 10층인 화장실 쪽 복도로 향했다. 1층 식당 화장실로 가기에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서 화장실로 소리를 보내는지 알 수 없으니, 10층 복도 유리에서 들렸던 소리를 따라가는 것이 제일 확실했다.
계단을 통해 한 층을 올라갔다. 최소 살인자가 있는 마당에 아무리 당당해도 예의상 발걸음 소리는 내지 말자 싶어서 조용히 걸었다.
10층은 아까 본 대로 복도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다 불투명 유리로 되어있었다. 내부를 보려면 중앙에 있는 문으로 들어가야 했다.
‘저 문을 열다가 영화에서처럼 칼이나 화살이 날아올까? 부자와 인연이 되어서 삶을 살아보나 했는데, 내일 다시 내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면 이 궁궐 같은 집에서 죽는 것도 나쁘진 않지. 부자 할방구만 껄끄럽겠지만 말이야.’
나는 얼굴에는 칼을 맞지 않고 심장 쪽에 맞춰달라는 심정으로 점프할 준비를 했다. 혹시 모를 일이니 미리 생각은 해둬야지.
‘슝!’
눈을 감은 채로 두 손으로 문을 세게 밀치며 들어가는 순간, 나는 계획한 대로 높이 점프를 했다.
‘지금이야! 비서 살인자님! 저를 향해 칼을 날려주세요!’
‘턱~’
하지만 내 몸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무 일 없이 땅바닥으로 패대기 쳐졌다.
“아야, 아이코.”
바닥에 닿아 아픈 몸 전체를 양손으로 쓰담쓰담하고 있는데, ‘척척척’하는 여러 명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내 주위로 원을 감싸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꿈인가?’
긴 장칼을 든 파란색 무사 옷을 입은 남자들이 나를 주시하면서 검의 손잡이 부분을 쥐며 빼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볼을 꼬집어보려다가 방금 몸 전체가 아팠던 기억이 나서 굳이 꼬집지 않았다. 눈만 동그랗게 깜빡거리다가 ‘아차’ 싶어서 이내 무안해져 얼른 일어났다.
“앗! 죄송합니다. 여기서 사극 찍으시는 것도 모르고 제가 무례를 범했네요. 하긴. 집이 크니까 드라마나 영화를 찍을 수 있겠어요. 장소협찬 할 만하죠. 하하하. 껴들어서 죄송합니다!”
머리를 긁적이며 무사들 사이를 지나가려 했다.
“…”
“실례지만 옆으로 조금만~”
“…”
“죄송하다니까요. 비껴주세요.”
“…”
“저기요! 무사양반! 으억~ 이거 진짜예요?”
문 쪽에 서 있는 무사변장을 한 남자들에게 미안한 표정으로 사과를 하며 비켜달라고 해도 꿈쩍을 하지 않았다. 화가 나서 큰 소리를 쳤더니 한 명의 무사가 검을 실제로 뽑아들며 내 목에 겨누는데, 그 검날에 손을 대보려다가 심상치 않은 날카로움에 손가락이 잘릴 것 같아 금세 거둬들였다.
“뭐 이리 소란이냐! 지금 왕께서 급한 일을 처리하시는데 어디서 감히 짐승 같은 노비가 소리를 내느냐!”
장검을 뺐던 무사는 검을 급히 칼집에 꽂아 넣었고 다른 무사들과 함께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엇! 비서님? 비서님도 출연하시나 봐요. 저는 다시 침실로 돌아가겠습니다.”
“무엇하느냐! 저 노비 놈을 포박하라!”
“예이~”
“앵? 노비? 내가? 윽~ 뭐 하시는 거예요. 저는 출연 같은 거 동의한 적 없다고요. 놔주세요! 감독님!”
같은 파란색이지만 계급이 한층 더 높아 보이는 한복을 입은 비서는 격조 높았던 행동과 말투는 어디 갔는지 사라지고 매서운 목소리와 호통 치는 말투로 다시금 거듭나 있었다. 무사들은 비서의 말에 나를 잡아 밧줄로 동여맸다.
“저 노비 놈을 왕 앞에 끌고 가거라! 어서!”
“노비 놈이라니요! 비서님!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입니다. 이 밧줄 좀 풀어주세요. 저 정말 안 참아요!”
“네 놈이 안 참아봤자 뭘 하겠느냐? 노비주제에~”
“으아아악~”
나는 온몸으로 발악했지만 남정네 다섯 명이 날 잡는 통에 꼼짝없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들은 손에 들려 공중부양을 한 채로 어디론가 끌려가면서 내가 있는 공간을 그제야 제대로 보게 되었다.
‘여기 진짜 조선시대 같아. 미니 경복궁? 경복궁이 집 안에 있다니. 어쨌든 집이 정말 크긴 크구나. 그런데 날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거야. 혹시 이벤트? 우와~ 오~’
이들이 끌고 간 곳은 3분 거리에 있는 금으로 만든 미니 기와집이었다. 한 무사가 문을 열려고 하자 비서가 무사의 싸다구를 날렸다.
“네가 감히 왕의 처소에 손을 대? 너 같은 건 사형이야! 꺼져!”
그 싸다구를 맞은 무사는 바로 뒤에서 내 왼쪽 몸통을 들고 있던 무사들의 의해 미니 경복궁 문 밖으로 끌려 나갔다. 비서는 문 앞에 엎드렸고 내 오른쪽 몸통을 들고 있던 무사들도 같이 엎드리자 나는 또 바닥에 패대기 처졌다.
“으악!”
“왕이시여~ 노비 놈을 데리고 왔나이다.”
“흠흠! 시간이 이르지 않더냐! 아직 일처리가 남았거늘!”
“그게 아니옵고, 저희가 체포하러 가려고 할 때 이 놈이 지스스로 이곳을 찾아오지 않았겠습니까! 가만히 두면 신선도가 떨어질 것 같아서 미리 데리고 왔나이다. 왕의 즐거움을 위해서요.”
“흠~ 역시 날 생각해 주는 사람은 자네밖에 없구려. 그럼 들어오시게나. 함께 무릉도원의 즐거움을 나눔세~”
“예이~ 이봐라~ 이 노비 놈을 왕 앞에 대령하라!”
“예이~”
‘이 사람들이 미쳤나. 자꾸 나를 노비 놈이라고 하질 않나. 무슨 즐거움? 신선도? 내가 냉동식품이야? 아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혹시 몰라서 속으로 삭이고는 있지만 분노가 점점 차오르고 있었다.
‘왕이라는 놈, 목소리만 깔았지 완전 미친놈이 틀림없어. 일반 배우일까? 아니면 혹시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
내 몸뚱이를 들 사람이 부족해 거의 바닥에 끌려가다시피 했는데, 금으로 만든 미니 기와집 문 안에 들어서자마자 사이코의 냄새가 가득 풍겨왔다.
벽이며 바닥이며 모든 부분이 다 보라색으로 칠해져 있고, 한쪽에는 물이 팔팔 끓는 커다란 단지가 불 위에 있었고, 그 옆에는 커다란 나무로 만든 상자들이 첩첩히 쌓여 있었다.
‘읍~ 비린내. 저 액체는 뭐야? 보라색처럼 보여. 포도즙은 아닐 텐데. 저… 저거는 관 아니야? 헉! 저… 저… 저건!’
“웁~ 웁~”
“사… 살려주세요.”
“집에 가고…싶어요.”
그리고 왕이 앉는 의자, 그러니까 용상 주위에는 열댓 명의 사람들이 엎어져 신음하고 있었다. 다들 죽어가는 중 같았다. 몸 한 부위에는 하나같이 육각형의 문양이 있었는데 화상을 입은 것 같았다.
“이 노비 놈! 왕 앞에 무릎 꿇어라!”
비서가 호통을 치자 무사들이 나를 왕이라는 사람 앞에서 무릎 꿇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왕이라는 사람을 보니 역시나 그 사람이 맞았다. 사극에서만 보던 왕이 입던 한복을 입었는데 이 또한 보라색이었고, 머리의 금관도 보라색,
“부자할방구?”
“뭐시? 네가 네 죄를 알렸다! 이 놈을 매우 쳐라!”
“예이~”
비서는 귀도 밝은지 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더니 무사들을 시켜서 나무막대기로 내 몸을 구타했다.
“으윽~ 웁~ 피….”
세게 맞았는지 입에서 피가 나오고 눈퉁이가 밤탱이가 되었다. 이 상황은 이벤트가 아니었다.
“왕이시여, 이제 직접 즐거움을 즐기소서~”
“오냐~ 하하하.”
부자할방구, 그러니까 보라색 한복을 입은 사이코왕이 쇠로 만든 방망이를 들며 내게 슬슬 다가왔다. 그 방망이에는 뾰족한 침들이 달려있었는데, 맞으면 한 방에 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원하는 건 이런 죽음이 아니었는데.
사이코왕이 내 앞에 서서 머리를 향해 휘두르려고 하는데, 눈물이 나도 모르게 줄줄 흘렀다.
“노비놈아~ 감히 왕의 신을 더럽혀?”
“흠흠. 불쾌하구나.”
“죽어라! 이 짐승만도 못한 신사장!”
사이코왕이 멈춰 서있고, 비서가 보라색 손수건을 꺼내 사이코왕의 신발을 닦으려고 할 때, 바닥에 엎어져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근처에 있던 철퇴를 집더니 사이코왕을 향해 달려왔다. 사이코왕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이코왕은 그대로 뾰족한 침이 박힌 쇠방망이를 들어 달려오는 남자를 향해 휘둘렀다. 그 남자의 배는 뚫렸고 그대로 즉사했다. 나는 눈물이 앞을 가려 잘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살인적인 소리들 때문에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었다.
“어떠하냐? 무섭지 않으냐? 그러기에 왜 제대로 대답을 안 하느냐~”
“… 무…무슨 대답… 이요?”
“이 노비 놈이 어디서 말대꾸를!”
“괜찮네~ 자네는 역시 든든하단 말일세. 하하하.”
“황공하옵니다!”
비서와 무사들이 90도로 허리를 굽혀 사이코왕에게 인사를 했다. 사이코왕은 흡족해하며 자신의 머리칼을 넘기더니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와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 죽이려고 왔어요? 살인자사신님?”
“… 살인자사신이 대체 누군데요! 저 아니라니까요!”
힘이 다 빠져 있다가 이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화가 다시금 치밀어 올랐다. 살인자사신이 누구길래 관계도 없는 나를 이런 상황까지 끌고 오다니 이 할방구가 착각을 해도 단단히 한 모양이었다.
“이 노비 놈!”
“억!”
비서인가 누군가가 내 머리에 나무막대기로 일격을 가한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쏴아~’
“일어나!”
“으흠. 여긴 어디.”
한 무사가 나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눈을 떠보니 온몸이 찌릿찌릿했다.
“여기는 왕의 연구실이라네. 왕께 감사하게 생각해. 어차피 오늘 저녁에 대규모 처형이 이뤄지겠지만 말이야. 살아남는 건 꿈도 꾸지 말게나.”
무사는 개밥그릇에 먹지도 못할 것들을 담아 내 앞에 던져주고는 나가버렸다. 몸에 밧줄이 풀려있어서 본능적으로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에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목에 밧줄이 매여 있어서 다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살아계시는군요. 다행입니다. 숨이 멎으신 줄 알고 놀랐어요.”
“… 어디?”
조그맣게 들리는 소리에 두리번거리니 저 구석 쪽에 있던 남자였다. 얼굴을 보니 아저씨뻘 같았다. 아저씨는 하얀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얼마나 맞았는지 옷 전체에 피투성이가 흰 천에 스며들어 울긋불긋 해졌다.
“괜찮습니까? 우리는 꼭 살아야 합니다. 살아서 저 미치광이를 고발해야 한다고요.”
“여기서 어떻게 살아남아요. 아저씨도 목에 밧줄이 매여 계시잖아요. 움직이지도 못하고 나가도 그 무사들이나 비서가 지키고 있을 텐데….”
“다 방법이 있습니다. 밧줄은 이렇게 풀면 되죠!”
아저씨는 옷 안, 그러니까 속옷 안에서 작은 칼을 꺼냈다. 밧줄을 자르는데 손에 힘이 잘 안 들어가는 모양인지 힘겨워했지만 그래도 다 자르고 내게 와서 밧줄을 잘라주었다.
“어서 가요!”
“네!”
“앗! 잠시만!”
아저씨는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뒤따라 나가려는 나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저 이거, 제가 잘못되거든 이 장치 들키지 말고 계속 가지고 계셔야 해요. 그래야 제 동료들이 와서 구해줄 수 있어요.”
“동료들이요? 지금 오고 계세요?”
“아뇨. 여기 위치가 어딘지 잘 모를 겁니다. 제가 갑자기 잡혀와서요. 하지만 이 장치의 신호를 받으면 바로 달려올 겁니다. 이 안에서는 신호가 닿지 않아 나가야 하는데, 그게 쉽진 않죠. 아무튼 이 장치 꼭 숨겨놓으세요.”
“아~ 네.”
난 갑자기 이 아저씨를 보며 아버지의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가 보내준 천사일까. 손톱만 한 장치를 받아 바지주머니에 넣었다가 왠지 빠질 것 같아서 속옷에 넣었다.
아저씨가 다시 앞장서서 문을 조심스럽게 여는데 이럴 수가, 사이코왕이 씨익 웃고 있었다. 저 웃음이 이제는 너무 징그럽게 느껴졌다.
“너무 대놓고 죽이면 재미없잖아. 너희들이 탈출하기를 바랐어. 아~ 이런 말투 말고, 왕 같은 말투를 써야 해. 흠흠! 어쨌든! 사약을 대령하라! 오~~ 제일 해보고 싶었던 말이야!”
비서가 이미 준비를 한 듯 바로 보라색 물이 담긴 그릇을 가지고 들어왔다. 아저씨는 나를 쳐다보며 해탈한 듯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무사들이 아저씨를 무릎을 꿇게 하고 입을 강제로 벌렸다. 비서가 그릇에 든 사약을 아저씨 입에 콸콸 쏟아붓자마자 목구멍에 다 넘어가기도 전에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입과 코에서 피가 나면서 정신을 잃었다.
“안 돼!!!!!!!!!!!!”
그 장면이었다. 내 눈에 환상같이 보였던. 아무런 생각이 안 들었다. 평소에는 죽고 싶어서 난리를 쳤는데, 내 눈앞에서 사람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다니. 양쪽 눈에서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무사들은 익숙한 듯 불이 지진 인두를 가져와 남자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그 육각형이었다.
“안되긴 뭐가 안 돼?”
“네가 죽인 장자철, 박의사는 되고, 저 남자는 안 되느냐? 살인자들은 죽여도 되고 목적의식 없이 살아가는 기계들은 죽으면 안 되느냐? 내가 왕인 세상은 목적이 뚜렷한 살인자들은 살아남고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내는 노비 놈들은 죽는 세상이니라.”
장자철, 박의사라면 뉴스를 통해 들었던, 내가 찾아갔던 경력직 살인자들이다.
“… 읍~ 그 살인자들과 무슨 관계지?”
“무슨 관계긴. 여기서 나의 신하들이었으니 아는 것이 아니겠느냐. 네 놈이 내 신하들을 죽이고, 앞으로 우리 회사 모델이 될 이아율도 잡아넣지 않았느냐! 내가 괘씸해서 가만히 둘 수 있어야지!”
다 같은 육각형 살인자들인가 보다. 육각형 살인자 동업자들. 이아율까지 이 사이코왕과 함께 하려 했다니 생각만 해도 오싹했다.
“…”
“괜찮다. 어차피 신하들은 계속 만들면 되니까. 하하하.”
“이 살인자.”
“칭찬해 줘서 고마운걸. 그러고 보니 자네 주위에 내 신하가 또 있더군. 아직 신생아라 이 유명한 살인자사신을 맡기기에는 무리가 있지. 이 왕이 몸소 처리해야 급이 맞지 않겠나.”
“…”
사이코왕은 혼자서 뭐라 뭐라 수다를 떨었다. 살인자 모드든 아니든 자랑질은 여전했다.
난 어떻게 죽임을 당할까. 아까 들어올 때 단지에서 끓고 있던 보라색 액체가 독약이 있었다. 사이코왕이 들고 있는 살인무기와 무사들이 들고 있는 장검들도 보였다. 그래. 이건 실제상황이야. 오늘 나는 여기서 죽는다.
‘그래, 어차피 지금 몸에 힘도 없어. 이렇게 죽고 싶진 않지만 별 수 없어. 내가 초능력자도 아니고 저 사람들을 어떻게 다 해결하고 살아남아.’
“으윽~ 좋습니다. 그럼 대표님! 나 좀 죽여주십쇼! 받아들이겠습니다. 대신 선택할 수 있다면 죽는 방식을 선택하도록 허락해주십쇼.”
“뭐시라?”
“흠~ 좌의정, 신선해. 이런 노비는 없지 않았는가. 내 생애 이렇게 즐거울 때가 없었던 것 같아. 하하하하. 역시 살인자 사신은 뭐가 달라도 다르지.”
“아~ 네~ 왕께서 즐거우시다면 저는 뭐라도 다 좋습니다요~”
사이코왕은 내 말에 기뻐하며 아기같이 막 웃었다. 그동안은 사냥꾼처럼 사냥하듯이 사람을 일방적으로 몰아서 죽였나 보다. 이렇게 먼저 건의하는 피해자는 없었나 보지.
“그러고 보니 네가 살인자들을 죽였으니 네 놈도 살인자구나. 하하하. 네 놈을 살려야 하나? 좌의정,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문제는 신하들과 상의를 해봐야겠습니다만, 왕께서 계획이 있으시다면 뜻대로 하옵소서.”
“흠~ 좋다! 살인자 사신! 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휴~ 그럼 저는….”
“다만 네가 여기를 벗어나 마당에 있는 금그네에 도착한다면 죽는 방식을 선택해 주지. 보아하니 한방에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여기는 비록 조선시대지만 다른 방에는 총도 있다네. 하하하. 금그네는 나의 최고 자랑이지. 총도 말이야. 외국에서 수입해 온 총인데 영국왕실에서 쓰던 총이야. 누가 나의 재력을 따라가겠느냐. 나의 부귀영화는 우리 옛 선조들로부터 시작된 것이야. 하하하.”
“제가 어떻게 이 상태로 금그네에 도착할 수 있나요? 이미 잡혀있는 상태인데요.”
“그건 걱정하지 말게나. 우리는 10층에서 자네는 9층 침실에서 시작할 거라네.”
“조… 좋습니다.”
“그럼 30분의 휴식시간을 주지.”
“네…네.”
나는 무사들의 강제적인 부축을 받아 서서히 일어났다. 왼쪽 다리뼈가 금이 갔는지 통증이 밀려왔지만 아랜 입술을 꾸욱 다물고 참았다.
“단 나가지도 못하고 잡혔을 땐 말이야. 히히히.”
“네?”
“내가 새로 만든 살인공에 맞아 죽을 걸 각오하게나. 히히히.”
사이코왕은 생각만 해도 기쁜지 나를 보며 제발 좀 실패하라는 표정이었다. 마치 입꼬리가 귀에 걸린 악귀 같이 보였다.
“아 삭신이야. 어떻게 1층까지 내려가서 금그네를 탄단 말이야. 금그네를 타면 깔끔하게 죽고, 중간에 잡히면 그 공에 죽을 때까지 맞아서 고통스럽게 죽는단 말인데, 힘이 쭉 빠지네. 살고 싶지도 않지만 원하지 않을 때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죽기는 싫어. 하아~”
나는 무사들의 의해 아까 묵었던 9층 침실로 옮겨졌다. 나는 바로 침대로 가지 않고 소파에 앉았다. 왠지 그 침대에 누우면 다시 잠들 것 같아서 꺼려졌기 때문이다. 이제 20분의 시간이 남았다. 멍하니 앉아있다 보니 아까 사약을 마시며 죽어가던 아저씨가 생각났다.
“아저씨…. 읍.”
눈물이 또 날 것 같았다. 상황이 왜 이렇게까지 됐나 싶었다.
“난 그저 내 인생에 새로운 일이 생길 줄 알고, 다시 살아갈 희망이 생긴 줄 알고 온 건데. 내가 그렇게 잘못했어? 부자를 바란 게 내 잘못이야? 이렇게 태어난 게 내 잘못이냐고. 흑흑흑.”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 제일의 라면회사라는 타이틀만 보고 혹한 내 내 잘못이지만 행운을 바란 게 그렇게 잘못인가 싶었다.
“나도 이런 세상 살기 싫어. 누가 살고 싶어서 살아? 숨 쉬니까 살지? 흑흑흑.”
한탄을 하며 울고 있는데 아까 바닥에 널브러져 신음하는 사람들이 생각났다. 아마 그 사람들도 모두 죽임을 당해서 나무관에 넣어질 것이다.
“그 사람들은 뭔 죄야. 으엉엉.”
속옷에 있던 장치가 생각났다. 아저씨가 주었던 장치였다. 나는 얼른 장치를 꺼냈다.
“흡! 울지 마! 주인공. 이 장치 신호가 닿으면 동료들이 구해주러 온다고 했어. 그 아저씨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밖에까지 가야 해.”
나는 눈물을 닦고 냉장고를 열어 음료수도 마시고 주머니에 넣었던 과자들도 막 먹다가 시계를 보았다. 10분 남았다.
“어떻게 하지?”
창문을 열려고 보니 열리지 않는 창문이었다. 순간 내 눈에 침대가 보였다. 나는 휴지로 코를 막고 베개 커버를 벗겼다. 고개를 돌려 침실 안을 넓게 바라보니 벽에 중세시대에나 쓸법한 방패가 달려있었다. 좀 무거웠지만 장검에 맞을 수도 있으니 방패를 오른손에 들었다. 그리고 코트를 입은 상태에서 베개 커버를 한쪽에 다른 쪽에는 샴페인을 넣고 단추를 잠갔다. 양어깨에는 컵을 거꾸로 넣어 뽕을 만들었고, 커튼을 묶은 끈을 허리에 묶었다. 어설프지만 나름의 준비가 끝나고 나니 5분이 남았다.
“나머지는 태권도를 한 내 몸뚱이를 쓰자. 아직은 쓸 만할 거야.”
다리에 금이 가서 아프긴 해도 국가대표 선발전 준비할 때와 비교하면 이 정도는 껌이었다.
“아버지, 도와주세요. 저는 검에 맞아 죽어도 사람들은 살릴 수 있게 도와주세요.”
무슨 내가 영웅이나 된 듯 사람들을 살리자고 이런 말을 중얼거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솔직히 나도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 괜히 사람들 핑계 대지 않고 순수하게 여기서 저 사이코에게 고통당하며 죽고 싶진 않았다.
2분, 1분.
“가자!”
문을 열자마자 위에서 우당탕당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곧장 9층에서 8층으로 가는 계단으로 뛰어내려왔다. 뒤를 볼 새도 없이 보이는 계단으로만 내려가는데, 7층에 무사 한 명이 서 있었다.
“받아라!”
장검을 빼서 나를 치려고 휘둘렀다.
“태권! 악!”
나는 방패를 힘차게 내밀었고 그 검이 방패에 가로막혔다. 무사가 당황하며 다시 휘두르려 할 때, 재빨리 주먹으로 무사의 얼굴에 어퍼컷을 날렸다. 무사가 휘청하는 순간, 나는 바로 장검을 빼앗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또 한 명의 무사가 서 있었다. 아까 그 무사보다는 덩치가 컸다. 층마다 배치했나 보다. 똑같이 검을 휘두르기에 방패를 내밀었더니 한술 더 떠서 검으로 방패를 날려버렸다. 나는 당황했지만 바로 정신을 다잡고 뺏은 검을 빼들었다. 뒤에서는 무사들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고 앞에서는 힘이 세 보이는 장사 무사가 가로막고 있으니 빨리 처리하고 내려가야 했다. 태권도를 했을 때 잠깐 검도를 배운 적이 있었다.
“헉!”
장사 무사의 실력에 비해 나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장사 무사에 일격에 내 장검은 날아가고 넘어지자 장사 무사가 쓰러진 나를 향해 검을 겨눴다.
‘그런데 말이야. 이 놈은 날 죽이지 못해. 사이코왕이 날 어떻게 죽일지에 대해 정하려고 이런 일을 벌일 건데, 이 놈이 날 죽이면 이 놈이 죽겠지. 좋아!’
나는 사이코왕처럼 한쪽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재빨리 검날을 피해 베개커버를 꺼내 곧장 무사 얼굴을 덮어 씌웠다.
“으윽~ 뭐야아아~ 음냐음냐~”
장사 무사는 반격을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어때~ 나의 실력이!”
“게 섰거라!”
재빨리 다시 내려가는 데, 이번에는 디자이너가 서 있었다. 여자라서 만만할 것 같았는데 양손에 커다란 가위를 들고 있었다. 언제 적 가위손이야?
“너도 한 패야?”
“너라니! 이 노비 놈이! 받아라!”
그래도 나는 체육인이다. 여자를 심하게 다뤄선 안 되니 예의를 갖춘다.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가 한 바퀴를 돌려 옆으로 살짝 던졌다. 계단 아래를 넌지시 바라보자 그동안 저택에서 봤던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대로 계단으로 내려가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아! 미끄럼틀!”
아까 비서가 강제로 태웠던 미끄럼틀이 생각나서 그쪽으로 뛰어갔다. 다행히 그쪽은 사이코왕이 생각을 못했는지 아무도 없어 초스피드로 달려가 미끄럼틀을 탔다. 그런데 이게 웬일. 미끄럼틀 아래 1층에는 비서가 그러니까 좌의정이 엄숙하게 서 있었다.
“이노오오옴!”
나는 내려가는 동시에 커진 스피드로 좌의정 배에 어깨빵을 해버렸다. 여지없이 무너진 좌의정. 내가 너보다는 어리단 말이야. 드디어 처음에 들어왔었던 큰 문이 보였다. 여기서 벗어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희망에 부풀어 뛰어가다가 내 뒤로 뛰어왔던 모든 무사들이 문 앞으로 다 집결했다. 한 이십 명쯤 돼보였다. 그 앞으로 사이코왕이 천천히 걸어왔다.
“우리의 왕께서 행차하십니다.”
비서는 정신 차리고 일어나 90도로 인사를 하자, 무사들도 함께 인사를 했다.
‘여긴 사이코월드야.’
“어떠냐? 내 세상은 이렇게 완벽하다네. 여기서 인생을 마감하겠느냐? 아니면 끝까지 해보겠느냐? 여기서 그만두고 죽겠다고 한다면 사약으로 바꿔주마. 하하하.”
“음, 잠깐만요.”
나는 서서히 앞으로 다가가면서 등 뒤로는 샴페인병을 흔들었다.
“잠깐은 없다! 저 놈을 포박하라!”
나는 사이코왕의 말에 엄청 흔들어댄 샴페인 뚜껑을 따서 던지자 샴페인 병이 인공지능이었는지 무사들에게 날아가 머리를 때리고 바닥을 미끄럽게 만들어 자기네들끼리 엎치락뒤치락 산을 쌓게 만들었다.
‘좋았어. 저 사이코 왕 한 명이면 뚫고 가기 충분해.’
“이얍!”
나는 허리에 두른 끈을 한 번 ‘탁’하고 펼쳐 기합을 잡은 뒤 앞으로 돌진했다.
“좌의정! 좌의정!”
좌의정은 급히 문 앞으로 뛰어가 두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나는 뛰어가면서 허리에 끈을 풀어 그 두 손과 얼굴을 묶어버렸고, 결국은 문을 밀어 여는데.
‘퍽!’
“으윽~ 안 되지. 안 되지. 네 맘대로 죽을 순 없어. 나는 총보다 살인공이나 방망이나 사약이 좋단 말이야. 과거가 좋다고. 현재는 재미없어. 히히히.”
사이코왕이 어디서 막대기를 가져왔는지 내 머리통을 날렸고 나는 그대로 문손잡이를 잡고 쓰러졌다.
“아버지, 어머니, 아저씨. 죄송해요.”
정신을 잃었다. 이러다 머리통이 남아있을까 싶다.
“정신 차리세요. 환자분! 눈 뜨셨군요! 지금 구급차에 실려 가고 있으니 곧 치료받으실 수 있으십니다.”
“으윽~ 어떻게 된 일이죠?”
“덕분에 사람들을 구했어요. 잘하셨습니다.”
“정말요? 으엉엉엉. 아악~”
“머리 출혈이 있어서 우시면 안 돼요. 열이 올라서 조심하셔야 해요.”
나는 자지러지게 울다가 구급차 안에 있던 구급대원의 말에 눈물을 멈췄다. 함께 탄 처음 보는 아저씨는 국가정보원이라고 하셨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쓰러지면서 위치추적장치를 그 작은 문틈새로 던지는 순간에 위치가 바로 감지되어 대기 중에 즉각 달려오셨다고 했다.
119 구급대원의 도움으로 병원 응급실 앞에 내리자마자 눈앞이 번쩍번쩍했다.
“육각형 살인사건 주범인 신사장을 잡은 소감이 어떠십니까?”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무지개 대기업 총수의 저택에 가신 이유는 뭐죠?”
“말씀해 주십시오!”
기자들이었다.
“이거 원 난감하네. 괜찮으세요? 얼른 응급실로 들어가시죠.”
“네? 네. 저 한마디만, 기자님들. 저… 저는 잡지 않았어요. 아저씨와 동료분들이 잡으셨어요. 으윽~ 머리가.”
국가정보원 아저씨가 자신의 덩치로 나를 가려주었고, 나는 그 뒤에서 해야 할 말만 했다.
“그렇습니까. 그럼 이분이 신사장을 잡으신 분이십니까? 저희와 인터뷰해주십시오.”
“어떻게 된 겁니까?”
국가정보원 아저씨는 눈을 감고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업어 아무 말 없이 바로 응급실 안으로 직진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