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에 작약을 보았다

이웃 동네 산책길에

by 뮌헨의 마리


저 겹겹의 꽃잎. 저 탐스런 꽃송이. 저 매혹적인 빛깔. 며칠 동안 가라앉았던 마음이 금세 꽃처럼 피어났다. 컨디션이 오르고 힘이 났다. 우울은 날아가고 기분이 좋아졌다. 꽃 한 송이 때문에? 그렇다. 꽃 한 송이 때문에!


이웃 동네 아파트 화단에 핀 이 명품꽃은 설마 목단? (아니고 작약! 구독자이신 루씨님이 알려주셨다.)



요 근래 컨디션이 떨어지니 마음이 많이 약해졌다. 다시 추슬러야겠다. 날씨도 좋아지고 공원에는 꽃도 만발하다. 우울할 이유가 없다. 조금 우울했던 다른 이유는 공원에 노숙자 한 분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꼼짝도 않고 지정석 벤치에 앉아 있다. 두 손을 낡은 패딩의 주머니에 찌르고, 왼쪽 옆구리에는 얇은 모포 하나를 단단히 끼고. 머리는 장발에 구멍 난 양말과 슬리퍼 차림으로. 그가 앉은 벤치가 내가 산책하는 구간 안에 있어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다. 마음이 불편하다. 이유는 내가 도울 방법이 없어서. 그러나 불편한 건 내 몫일뿐. 그는 비가 오나 흐리나 맑으나 같은 벤치에 앉아 졸거나 눈을 감거나 말없이 앉아만 있다.


예전에 부산에 살 때도 노숙자를 본 적이 있다. 우리 동네에서 자주 보던 사람이었다. 큰 길가 화단에 설치한 정자 벤치에 누워 잠을 자던 그에게 어느 날 돈을 내밀자 그가 나에게 물었다. 나한테 왜 돈을 주는 겁니까? 그때의 충격이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그때 배웠다.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적선을 베푸는 것이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는 구걸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 이후로는 반드시 먼저 물어본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냐고. 제가 돕고 싶은데 괜찮겠냐고. 우리 공원에 나타난 사람에게도 물어보았다. 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호의를 거둘 수밖에. 그것이 사람에 대한 예의다.


이웃 동네 아파트에서 만난 철쭉나무(왼쪽). 우리 동네 공원 철쭉나무(오른쪽).



이런 불편한 마음을 잘 참지 못하는 게 문제다. 일명 나의 오지랖. 내 앞가림이나 잘할 일이지. 남에게 신경 끄고 다시 컨디션 조절에 들어가기로 한다. 주말에 다녀간 친구 M이 나에게 주고 간 충고가 있다. 몸이 하는 말을 잘 들어보라고. 산책이든 뭐든 계획한 대로 열심히 지키는 것도 좋지만 피곤할 때는 무조건 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으라고. 게을러져도 괜찮다고. 그런 후 컨디션이 좋아지면 다시 계속하라고. 나를 잘 아는 친구의 말이니 따르기로 한다. 친구가 알려준 발목 운동도 자주 하려고 노력 중이다. 알고 있던 동작인데도 친구가 말해주니 새삼 머리에 콕 박힌다.


다행인 건 돌아온 입맛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거다. 화장실도 잘 간다. 잠도 잘 자고, 밤새 화장실 들락거리는 횟수도 줄어서 한두 번 밖에 안 간다. 취침 시간도 길어져서 아침 6시에서 7시 사이에 일어난다. 더 놀라운 변화도 있다. 오전과 오후 산책 전후에 출출해서 공원 앞 카페에 들러 오트밀 요거트를 먹는 날이 많아졌다는 거다. 어제는 오전에도 먹고 오후에도 먹었다. 대신 엄마 집에서 점심과 저녁은 과식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현미 잡곡밥을 반 공기 정도 꼭꼭 씹어서 천천히 먹는다. 식후 산책도 거르지 않는다. 복대 두 개를 단단하게 매고 있어 소화에 문제가 생길까 봐 조심하는 편이다. 아직까지 별 어려움은 없다. 그 와중에도 내 사랑 참외는 오후 간식의 메인 자리를 놓지 않고 있다.


어제 오후에는 언니와 이웃 동네로 산책을 나갔다. 큰길을 건너 조금 더 걸어가자 오래된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오래된 아파트답게 오래된 나무들과 화단에는 꽃들이 많았다. 서늘하고 깨끗한 아파트 산책길을 오래 걷다가 보았다. 화단에 작약꽃! 설마 사월에 작약을 만날 줄은 몰랐다. 겹겹의 꽃잎. 저 탐스런 꽃송이. 저 매혹적인 빛깔. 며칠 동안 가라앉았던 마음이 금세 꽃처럼 피어났다. 컨디션이 오르고 힘이 났다. 우울은 날아가고 기분이 좋아졌다. 꽃 한 송이 때문에? 그렇다. 꽃 한 송이 때문에! 사람에게 실망한 날에도 이유 없이 울적하거나 지친 날에도 이 약효를 기억하려 한다. 얼마나 쉬운가. 꽃은 반드시 저 작약 빛일 것!



언니와 나갔던 이웃 동네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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