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6시 반에 전화하는 마음
독일에서 아이의 전화
독일 현지 시간 새벽 6시 반. 아이는 영상 전화를 걸어놓고 말이 없다. 엄마 얼굴만 바라보고 묻는 말에는 '응'이나 '아니'로만 답한다. 쥐들 안부를 물어야 생기가 돌 텐데 쥐 이야기를 하기엔 이르다. 잠은 잘 잤단다. 울지는 않았다.
공원의 봄볕(위). 친구가 사 준 오트밀 요거트와 아메리카노! 나의 아침을 책임 지는 한살림 호박죽 한 팩(아래).
내 친구 Y가 햇미역을 사 들고 왔다. 내가 독일에서 끓여 먹던 미역국이 맛이 없다고 하자 햇미역은 맛이 다를 거라면서. 봉지에 붙은 햇미역이라는 세 글자가 스티커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던 미역 두 봉지. 그 사이에 소고기 사 먹으라고 수줍게 끼워둔 봉투. 친구는 오후 2시 반에 와서 5시에 갔다. 나와 공원에서 오후의 햇살과 봄바람 속에 산책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카페에서 오트밀 요거트를 사주었다. 친구의 뜨거운 아메리카노도 서너 모금 마셨다. 그 맛! 독일에서 겨우 내내 맛보고 싶던 아메리카노의 맛. (독일에는 아메리카노가 없다. 블랙커피만 있다. 아주 쓴.)
친구도 나도 늦게 결혼을 했고, 아이도 늦었다. 친구는 딸 둘, 나는 딸 하나. 친구의 두 딸이 나이 차이가 나서 내 아이가 둘째처럼 딱 가운데였다. 셋은 자주 놀았다. 우리가 서울에 살 때. 친구의 큰 딸은 중 2. 친구도 나도 아이들이 대학에 가려면 십 년쯤 기다려야 한다. 일단은 그때까지 버티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친구는 지난주에도 왔고, 다음 주에도 올 것이다. 지난번보다 내가 기운이 있어 보인다고 기뻐했다. 눈빛도 선명하고 피부에 윤기도 있다나. 이게 다 친구를 포함 몇몇 이들이 신신당부하던 소고기와 오리고기를 먹은 덕분이 아닐까 싶다. 독일로 가기 전에 몇 번 더 먹게 될 것 같다. (독일에는 샤부가 없다. 샤부처럼 얇게 썬 고기도 없다.)
친구가 말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짐을 하나씩 지고 살아가는 것 같다고. 내가 얻은 암처럼, 그들 역시 가족 문제나 병고나 경제적 어려움 같은 고단한 마음의 짐들이 하나씩은 있을 거라고. 그런 것도 없이 완벽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꼭 행복한 인생은 아닐 거라고. 친구 자신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지난 일도 앞으로의 일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고. 지금 현재 우리가 마시는 아메리카노, 우리가 나누는 대화에 집중하는 것이, 지금 여기에 몸과 마음이 있는 것이 행복이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과거도 미래도 생각해봐야 괴롭고 초조하고 불안해서 도움이 안 되더라고. 그러니 나 역시 잘 이겨내라고 했다. 이 말이 하고 싶어서 그 많은 말을 돌아서 돌아서 왔겠지. 그러겠다고 했다.
공원의 벤치들. 턱 없이 모자란다. 더 많았으면 좋겠다.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마사지라니. 그런 것과는 인연이 없던 내가 말이다. K언니가 마사지를 잘하시는 시각 장애인 선생님을 소개해 주었다. 내가 독일에 있을 때 언니는 숙면에도 좋고 전자파도 적은 온수 매트를 보내주려고 했다. 직접 써보니 넘 좋다고. 문제는 내가 게으르다는 것. 이번에 한국에 오니 언니가 자기가 쓰는 것을 직접 보여주기도 했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인 나로서는 일을 벌이지 않는 게 최선이다. 언니가 전자파 없는 독일산 전기요도 소개해 주었다. 독일에서는 몰랐던 제품이다. 이런 아이러니. 아, 그래서 마사지는? 샵에 당장 전화를 했고, 언니 말대로 원장님 이름으로 예약을 했고, 어제저녁에 받고 왔다.
마사지를 받을 때도 복대는 계속했다. 요즘은 자기 전에 따뜻한 물로만 간단히 샤워를 하는데 그때만 풀어놓고 잘 때도 한다. 내 마사지 목표는 몸의 왼쪽. 왼쪽 어깨와 등과 날갯죽지로 이어지는 통증. 왼쪽 허벅지 바깥쪽의 둔중하고 저릿한 느낌. 산책 후의 왼쪽 발목의 불편함. (왼쪽 발목은 여러 차례 접질린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제대로 치료를 하지 않아 불안정한 상태였다. 발목은 친구 M이 내 마사지를 해주다가 알려주었다.) 마사지는 아프지 않을 것. 그게 나의 바람이었다. 아프지 않은 마사지도 있더라. 마사지 후 허벅지 부종도 좋아지고, 발목의 불편함도 훨씬 나았다. 날갯죽지 통증도 약해지고. 독일로 가기 전 몇 번 더 받을 생각이다.
새벽의 전화도 받았다. 한국 시간이 아니라 독일 시간으로. 점심을 먹기 전 산책 때였다. 아이였다. 이 시간에 전화를 받은 적이 없는데. 파파가 깨운 시간은 이른 아침 6시 반. 아이는 이번 주부터 학교에 갔다. 부활절 2주 방학이 끝난 후 반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격주로 등교하고 있다. 학교가 8시에 시작하니까 7시에 일어나도 충분할 텐데. 아이는 영상 전화를 걸기만 하고 말이 없다. 엄마 얼굴만 바라보고 묻는 말에 답만 한다. 쥐들 안부를 물어야 생기가 돌 텐데 쥐 이야기를 하기엔 이르다. 잠은 잘 잤단다. 울지는 않았다. 날 닮았나? 아이가 잘 울지 않는 편이다. 대신 내가 목이 멘다. 조금만 기다려. 엄마 곧 갈 거야. 엄마 가면 많이 안아줄게, 알았지? 아이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지금까지 잘 버텨주었으니 남은 시간도 그러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