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에게도 작별을

부심이란 신조어

by 뮌헨의 마리


전날 코로나 테스트 결과는 오후 4시에 나왔다. 공항철도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자 오후 5시 반. 늦은 오후 6시의 산책. 공원과 작별하기에 적당한 시간이었다. 잘 있거라 나의 공원. 네가 있어 내가 있었다.



오후 6시 공원의 햇살.



어느 독자분의 충고처럼 토요일 공항 근처에서 잠을 자는 것은 포기했다. 잠자리를 가리는 편이라 집이 아니면 잠을 못 자기 때문이다. 짐을 들고 호텔로 이동하는 것도 번거로울 것 같았다. 게으른 사람에겐 당일 공항 이동, 당일 탑승이 최고다. 일요일 아침 카카오 택시를 이용 출발하기로 했다. 짐이 좀 많은 건 걱정을 안 한다. 어떻게든 되겠지. 안 되면 돈을 쓰고. 이럴 때 믿을 건 머니의 힘.


전날 공항에서 코로나 검사를 받고 밥을 먹었다. 뭘 먹었냐면 돌솥비빔밥. 우리 언니와 J언니는 전통 돌솥비빔밥을, 나는 낙지 돌솥비빔밥을 먹었다. 돌솥은 누가 생각해 냈을까. 신통방통하다. 셋 중 내가 제일 많이, 제일 빨리, 제일 맛있게 먹었다. 누가 보면 내가 환자라는 것도 모를 같다. 하긴 나도 잊을 때가 있으니까. 한국이나 외국에서 돌솥비빔밥을 먹을 때면 묘한 편안함을 느낀다. 집에 온 것 같은 따스함. 일명 돌솥 부심이라 부르겠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허세나 자부심을 줄여서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한국에 와서 처음 들었다. 이렇게 쓰면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부심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얘긴데 내겐 청바지 부심도 있다. 한국에 올 때 청바지를 세 개나 들고 왔는데 한 번도 못 입었다. 바지통도 넓은 편이고 그 사이 살이 더 빠져서 헐렁해졌는데도 언니가 절대 못 입게 다. 청바지는 혈액순환에 안 좋다고. 그래서? 맨날 운동복 비슷한 언니 바지만 입었다. 전날 인천공항에 갈 때만 내 맘대로 청바지를 꺼내 입었다. 두 달만에 입어 보는 청바지.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처럼 기분이 좋았다. 얼마나 편하던지. 독일로 돌아가거나 내년에 다시 오면 원 없이 입을 생각이다.


저 무성한 사월의 나뭇잎들.



전날 코로나 테스트 결과는 오후 4시에 나왔다. 오전 11시에 받고 5시간 만이었다. 공항철도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자 오후 5시 반. 생각보다 일찍 와서 저녁 식사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다. 늦은 오후 6시의 산책. 나의 부심 중 원픽인 공원과 작별하기에 적당한 시간이었다. 있거라 나의 공원. 네가 있어 내가 있었다. 몇몇 친구들과는 톡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K가 말했다. 얼굴을 못 보고 보내서 천추의 한이 될 거 같다고. 런 말은 마음 없이는 절대로 안 나오는 멘트다. 친구의 뜨거운 진심. 이런 친구가 있어 행복한 나.


저녁은 샤부를 먹었다. 지금껏 밥상 차리느라 고생하신 친정 엄마를 위해. 그런데 저녁도 엄마가 사시더라. 그동안 별 차려준 것도 없어 미안했다고. 아이고 참. 엄마들은 자식들 미안하게 만드는데 선수들이시다. 추월할 길도 초월할 방법도 없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받아야 한다. 언니는 밤늦게까지 짐을 싸고 풀고 빼고 넣었다. 리스트는 끝이 없고 다 가져가려면 끝도 한도 없다. 대충 챙겨가는 게 답인데 그게 안 되나 보다. 이해도 되지만 저러다 독일 가자마자 쓰러지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언니가 아닐까.


몇 번이나 공원을 찾아와서 오트밀 요거트를 사 주던 내 친구 Y도, 출국 전날 공항으로 달려와 밥을 사 주고 간 J언니도 말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자고. 두 사람의 말이 에크하르트 톨레의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는 책 보다 크게 와 닿았다. Y의 말처럼 지금 당장 먹고 입고 자고 사는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데 뭐가 문제인가. 병이 있다고 치자. 내게 찾아온 병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는 일. 오늘 무엇을 먹을까, 오늘 얼마나 걸을까가 중요하다. 소리 내어 웃을 때 병은 빛을 잃는다. 존재감을 잃고 설 자리를 잃는다. 나를 찾아온 이들이 내게 선사한 것도 그것이었다. 고마웠다. 돌아가서도 그 웃음을 기억하겠다. 모국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쓸데없는 농담이 독일어로 가당키나 한가. 다시 살아나는 나의 모국어 부심.


이제 공항으로 출발한다.



2021.4.24. 하늘은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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