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가 현미밥과 된장국과 시금치 나물을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밥과 국을 두 번이나 먹고 오후 다섯 시에 잠이 들었다가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났다. 내 침대에서 옛날처럼.
저 황토 베개를 두고 내렸다! 오호 통재라..
출국날 새벽 다섯 시 반. 잠은 얼마 못 잤지만 컨디션은 좋았다. 평소대로 사과를 먹었고, 영양 보충제와 호박죽까지 깨알같이 챙겨 먹었다. 여섯 시 오십 분. 카카오 택시를 부를 시간. (우리 언니는 카카오 택시를 이용한 적이 없었다.) 불안의 징조가 엿보였지만 어쩌겠는가. 일곱 시 이십 분. 카카오 택시도 등록이 필요하네. 카드 등록까지 하래. 삼십 분을 씨름한 끝에 택시가 왔다. 택시 중에서도 큰 택시를 골랐다. Kakao T venti. 6인승쯤 되고 가격은 58,000원. 소요 시간은 40분. 여덟 시 정각에 공항에 도착했다.
떠나는 것은 쉬웠다. 쿠쿠 밥솥까지 짐이 많은 편이었는데 내 비즈니스 좌석이 60킬로까지 보낼 수 있는 걸 믿어보기로 했다. (원래는 무게나 사이즈 상관없이 2개만 보낼 수 있다.) 짐 두 개 통과. 밥솥은 안 될까요. 올려보시라 한다. 언니는 이코노미석이라 23킬로까지 1개만 보냈다. 남은 건 기내용 여행 가방 두 개. (하나는 무거웠다. 된장 같은 게 들어서.) 체크인 카운터 여직원이 눈썰미가 좋은지 하나가 무거운 줄 눈치를 챈 모양. 하나 더 보내 드릴게요. 기내짐은 8킬로까지 제한이 있거든요. 얏호! 무거우니 위에 올리지 말고 의자 밑이나 바닥에 놓으라는 내 말이 그녀의 귀에 가닿았나 보다.
비행기에서 잠은 많이 못 잤다. 눕는다고 잠이 오는 건 아니라서. 누워서 책을 읽다가 두세 번 깜빡 잔 게 다였다. 탑승객이 적어서 기대대로 언니도 누울 수 있다고 했다. 중간에 승무원 편으로 영양제도 보내고, 문자로 안 춥냐고 추우면 뭘뭘 보내겠다고 해서 나한테 또 혼나고. 난 덥기만 하던데. 따뜻한 담요까지 있는데 춥긴 뭐가 춥냐고. 한국에 올 때는 기내식을 거의 안 먹었는데 이번에는 맛있게 먹었다. 두 번 다 양이 많아서 반만 먹었다. 남편이 채식으로 예약한 건 잘했다. 중간에 시간을 보니 아직도 5시간이나 남았다. 영화 한 편을 보면 절반은 날아갈 듯해서 고른 건 독일에서 작년 봄에 개봉한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드폰 없이 영어 자막만으로 대충 본다고 해서 마음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니더라. 아, 헤세여! 나르치스여, 골드문트여.
야채 샐러드와 카레라이스/과일과 카레두부는 용감하게 해치웠다.
입국은 쉽지 않았다. 언니는 하강 내내 멀미에 시달린 듯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나는 멀쩡했다. 입국 심사장부터 대란 예고. 한번도 써 본 적 없는 입국신고서를 쓰란다. 우리 말고 아무도 쓰는 사람이 없었다. 끙끙 거리며 쓰고 있는데 입국심사장 문 닫는다고 안 써도 되니 다시 심사장으로 가란다. 이번엔 언니가 왜 3개월이나 있어야 하는지 근거를 대란다. 이 코로나 시국에. 내가 항암을 해야해서 그런다고 암수술 관련 서류를 보여주자 심사한다고 기다리라며 사라지심. 다시 돌아와 똑같은 질문과 답변. 왜 꼭 언니가 있어야 합니까? 한국 음식을 해준다고요? 독일 음식과 한국 음식이 다릅니까? 언니의 머리 뚜껑이 열리기 직전에 다행히 통과. 이번엔 공항 코로나 테스트가 발목을 잡았다. 휴대폰 GR로 등록을 하라는데 현지 직원의 아이패드로 신청을 겨우 했다. 코로나 테스트는 코는 안 하고 목만 했다.
남편과 아이가 오래 기다리고 있어 마음이 바쁜데 이번에는 짐이 걸렸다. 젊은 세관 직원이 짐을 하나하나 풀어보란다. 지난 십 년 동안 처음 겪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집 나간 자가 다시 돌아오려니 만만치 않구나. 갈 때는 내 맘대로였는데 올 때는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교훈이겠지. 언니가 세 개를 펼쳐서 세밀하고 정밀하게 설명하니 나머지 두 개는 보지도 않고 잘 가란다. 내 투병에도 행운을 빌어주었다. 드디어 재회의 시간. 아이는 못 본 사이 키가 더 컸고, 남편은 얼굴도 배도 홀쭉했다. 아이를 꼭 안자 쑥스러워했다. 집에 가서 더 안아주었다. 조카가 현미밥과 된장국과 시금치 나물을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밥과 국을 두 번이나 먹고 오후 다섯 시에 잠이 들었다. 자다가 두세 번 깬 후 새벽 다섯 시까지 잤다. 내 침대에서 옛날처럼. 밤에 아이가 내 곁에 눕길래 한 번 더 안아도 주고.
집에 오자마자 쥐들과도 인사를 했다. 쥐들에게 뚱뚱하다고 하지 말 것. 큰소리로 대화하지 말 것. 쥐들이 놀래니까. 아이는 깐깐하게 주문을 했다. 뚱뚱하다는 멘트로 바바라 고모는 이미 아이방 출입금지를 당한 모양이었다. 언니와 나는 목소리가 크다고 주의를 받았다. 세 마리는 코코넛 집에 옹기종기 들어가 한 놈만 대표로 고개를 내밀더라. 전날 남편과 아이는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발코니 의자와 탁자와 바닥까지 말끔하게 청소를 했다. 남편이 아이를 시켜 꽃도 사놓았다. 아침에 보니 부엌 식탁에 중국 식당에서 주는 Fortune Cookies 두 개가 있길래 언니와 내가 하나씩 열어보았다. 나: Charming, you know how to impose your wishes. 언니: Spring will bring you good luck! 운을 부르는 포춘쿠키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다.
맛있는 아침 식사와 다시 돌아온 나의 발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