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라틴어 시험 결과를 받아왔다. 최고 점수 1을 받고 좋아하던 모습도, 겨울 방학 직전에 또 라틴어 시험을 본다고 걱정하던 모습도, 떠나간 계절과 함께 지붕 위 황금빛으로 반짝이던 12월 초겨울 저녁.
오랜만에 석양이 비치는 12월 첫날 뮌헨의 우리 동네.
아이가 라틴어 중간고사 점수를 받아왔다. 최고 점수인 Note 1을 받은 아이의 기분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기쁨의 크기로만 보자면 과거에 붙은이도령이 암행어사로 출두한 수준. 자신의 라틴어 점수를 빨리 브런치에 안 올리냐고 재촉은 또 얼마나 하시는지. 내 글쓰기에도 나름 순번이란 게 있는데 말이다. 라틴어 시험을본 날 흥분한 채로 엄마에게 날린 카톡이 오자란 걸 알았나 보다('나티너'라든가 '시웠다' 등등). 엄마가 브런치에 카톡을 올린 걸 보고는 몹시도 부끄러워했다. 어떻게 자기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공개할 수 있냐며. 물론 나도 물어볼까 말까 몇 번 망설이긴 했지. 그런데 물어보나 마나 못 올리게 할 게 뻔한데? 나도 무뇌가 아닌 바에야.
아이는 이번 점수로 중간고사 직전에 친 라틴어 예비 시험의흔적을 지우고 싶어 하는듯했다. 예비 시험 점수가 과락 직전에 가까스로 멈춘 Note 4였으니까. 이해는 된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지우고 싶은 순간이 없겠나. 하지만 과거라는 게 본인이 지우고 싶다고 저절로 지워지는 게 아니라는 게 인생의 아이러니다. 기억이란 그것을 기억하는 자들의 몫으로남는 법이니까. 우리가 할 일? 애석하게도 없다. 지우개로 지우겠나, 비로 쓸겠나. 부끄러움도 우리 삶의 일부이자 자신의 일부라는 걸 인정하는 수밖에. 실수가 우릴 키운다고 하면 억지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누구나 묻어두고 싶은 과거 한자락쯤없으려나 생각하면 위로가 된다. 남들은 우리 일에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들려줄 참이다. 남의 일에 신경 쓸 시간에 책을 읽거나 멍 때리거나 잠이라도 자는 게 낫다는 말도.
시험지는 총 3장인데, 아이가 다 공개하는 걸 원치 않는 바람에..
아이의 라틴어 타령이 다시 시작이다. 교과 진도가 너무 빠르단다. 가을 학기 중간고사를 친 지는 한 달이 지났고, 11월 첫째 주는 가을방학, 둘째 주는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12월이 되자 크리스마스 방학 전에 기말고사를 한 번 더 친다며걱정반 한숨 반이다. 한 주에 한 과씩 진도를 나가는 건 그렇다 치고, 본문 텍스트가 끝나기도 전에 다음 과의 어휘를 시작하는것도 힘들단다. 배운 걸 소화할 시간은 없고, 새 문법과 어휘는 밀려들고. 듣는 엄마도 안타깝다. 그러나 어쩌랴, 선생님의 수업 방침이 그러시다는데. 아이는 지금 김나지움 6학년이다. 라틴어 반은 두 그룹에 각 18명. 아이의라틴어 선생님은 막 교직에 발을 들이신 새내기시다. 의욕 충만에 기대치도 높으심. 학생들에게 라틴어 점수를 최고 점수인 1만 기대하신다고. 이게 가능? 물론이다! 독일은 상대 평가가 아니라서.
결과는 선생님 승. 이번 라틴어 중간고사에서1을 받은 학생은 우리 아이뿐만이 아니었다. 총 18명 중 무려 11명이 Note 1을, 3명이 Note 2를 받았다.(나머지는 Note 4가 2명, Note 5가 2명.) 매 학기말에 받는 성적표에는 각자의 성적만 있고, 순위는 없다. 열심히 하면 1등이 될 수 있는멋진 시스템같다.누구라도 잘하는 과목 하나쯤은 있을 테니까.그 과목에서는 내가 최고라는 자부심이 아이들의 자존감을 키워줄 수도 있을 테니까. 첫 시험에서 아이들은 최선을 다했고, 선생님의 바람도 이루어졌다. 나중에 듣기로 이런 경우 문제의소지가 있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한 과목에 1, 2를 받은 아이가 많을 경우 선생님이 시험의 난이도와 채점 과정에 문제가 없음을 입증해야 한다고. 참고로, 같은 점수라도 마이너스가 있고, 플러스도 있다.
아이의 학교 라틴어 교재(위). 고대 라틴어의 예(대문자 부분/아래).
라틴어가 한국어와 어순이 같다고 말하면 놀라실 분들이 많을 것이다. 라틴어는 동사가 문장의 끝에 올 때가 많다. 놀랍지 않은가. 많은 유럽 언어의 근간이 되는 라틴어의 기본 문장 구조가 한국어와 비슷하다니! 이것을 내게 알려준 사람은 홀가였다. 홀가는 독일에서 박사 과정을 하다 건강 문제로 한국에 돌아간 M의 남자 친구다. 독일인이라고 해서 독일어를 잘 아는 건 아니다. 홀가는 영어, 라틴어, 불어에 조예가 깊고, 지금은 한국어를 독학 중이라서 아이의 라틴어에 대한 조언을 구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친구였다. 웃고 들어갔다가 울고 나올 수 있는 게 불어일 수 있다는 것도 홀가에게 들었다. 나 역시 고등학교 때 제2 외국어로 불어를 선택한 적이 있어서 안다. 불어가 쉬운 언어가 아니란 것을. 라틴어도 마찬가지겠다. 세상에 쉬운 외국어란 없다. 라틴어에도 우리말에 없는 여성형과 남성형이 있고, 고대 라틴어는 대문자로만 쓰고 띄어쓰기가 없었다고 한다.
외국어 공부의 기본은 어휘다. 그러니 불안을 다스리는 첫 단추도 어휘 연습일 수밖에. 아이와 다시 어휘 연습을 시작했다. 그러다 뜻밖에 만난 단어는 에쿠우스 equus. 에쿠우스가 라틴어였어? 반가움 반 놀람 반. 에쿠우스는 말(馬)이라는 뜻이다. 송승환이 아니고. 내게 에쿠우스란 이제는 노년으로 접어든 배우 송승환과 동의어였는데. 에쿠우스를 검색하면서 기억이 났다. 그로테스크하고 충격적인 연극 내용이 광장에서 채찍질당하는 말을 부여안고 울부짖었다는 니체가 오버랩되기도하는. 어제는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성탄절 방학 전에 라틴어 기말 시험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단다. 그래야 1월에 치는 수학, 독일어, 영어 세 과목에 집중할 수 있다며. 절친 율리아나와 불어를 선택한 친구들처럼 1월에 불어 포함 주요 네 과목을 한꺼번에 치려면 힘들 것 같다고. 모든 희로애락은 비교에서 온다. 비교에도 이런 긍정적 측면이 나올 수 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