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아이는 김나지움에서 제2 외국어로 라틴어를 시작했다. 울고 들어갔다가 웃고 나온다는 라틴어. 물론 잘했을 때 얘기고, 영원히 울 수도 있다. 독일 학부모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과목, 아이와 함께 배우는 첫 라틴어 공부!
라틴어 교과 내용(위). 제1과 본문/교재/어휘(아래)
아이는 올해 독일 김나지움 6학년이 되었다. 우리로 치면 초등 6학년. 독일의 초등학교는 4년 제라 우리보다 2년 먼저 중학생이 된다. 철이 빨리 드는 있는 학제라 할까. 초등생이 아니라는 자부심과 겉멋은 김나지움 첫 해인 작년 가을 5학년 때 하늘을 찔렀다. 김나지움은 독일 인문계 중등 교육기관으로 우리나라의 중고등학교가 합쳐진 형태다. 원래 9년제에서 1년이 줄었다가 최근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 예를 들어 지금 고학년들은 12학년 때 졸업하지만, 우리 아이는 5학년에 입학해서 13학년 때 졸업한다. 의무교육 12년제가 대세인 세계화의 흐름에 맞춘다고 도입되었다가 학생들의 부담이 과하다는 학부모들의 의견이 반영되었다.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독일 애들이 공부를 하면 얼마나 한다고? 한국을 몰라서 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알고 보니 내가 독일을 모른 거였다. 독일 김나지움 졸업 시험 아비투어도 무척 어렵다고 한다.)
초등 4학년 때 6개월 가까이 계속된 김나지움 입학을 위한 시험 기간만 빼면, 김나지움 5학년 때까지만 해도 그런 줄 알았다. 5학년때보다 두 과목이 늘어서 지금은 총 12과목을 배우는데 그중 영어 비중이 커졌다. 초등 3, 4학년 때는 초급 어휘를 위주로 간단히 배웠는데 김나지움에 들어오자 영어 교과서의 무게감부터 달랐다. 착실히 어휘력을 늘리지 않으면 6학년 때 힘들다는 주변 엄마들의 염려도 들었다. 독일 엄마들이 그렇게 말할 땐 이유가있을 테니까. 독일에서 자란 적이 없는 내가 독일 학교에 대해 뭘 알겠는가. 남편도 김나지움을 몇 년 다니다 미국으로 건너갔기에 도움이 안 되심. 태생이 이과인 그가 김나지움 때 라틴어 때문에 고생 꽤나 하셨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그런 남편이 수학이 제일 쉽다는 아이에게 라틴어를 선택하라고 부추긴 이유는 뭘까?
추측컨데, 의대 선택까지 고려한 아빠의 기대와 욕심이 아닐까. 라틴어가뭔지도 모르는 아이가 아빠 말에 혹해서 선택한 결과일테니까. 6학년 때 배울 제2 외국어를 결정한 건 5학년 2학기인 올해 봄. 그때 나는 한국에 있었다. 차라리 그게 나았는지도 모른다. 독일에 있어봤자 결과에는 상관없이 가정불화만생겼을 수도 있고. 2대 1을 무슨 수로 이기나. 처음에는 라틴어를 기어이 무찌르고야 말겠다는 아이의의욕으로만 보자면 당당히 로마 원형 경기장에 들어서는 전사 gladiātor 수준이었다. 라틴어를 하겠다고 했다가 막판에 프랑스어로 돌아선 절친들을 후회하게 만들고야 말겠다는 원대한 포부도 함께.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인생이 그렇게 만만할 리 있겠는가. 라틴어 역시 그랬다. 전에도 말했듯이, 처음엔 참담했다.
김나지움 6학년 아이의 첫 라틴어 수업(2021.9.16)
가을학기인 1학기에 아이는 두 번 시험을 친다. 성적에 반영되는 주요 과목은 4과목, 수학/독일어/영어/라틴어(혹은 프랑스어)다. 각 과목들은 매 학기 두 번씩 시험을 치른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전에 치는 예비시험이란 게 있다. 일명 엑스 Ex 시험. 아이는 라틴어 예비시험에서 4를 받았다. 1~6까지인 성적에서 4는 낙제 직전의 아슬아슬한 점수다. 구사일생, 풍전등화, 백척간두 등등의 사자성어가 머릿속을 휘젓는 가운데 내게 등불이 되어준 건 전화위복이나 새옹지마 같은 옛말들이었다. 예비시험 전에 아이는 내 도움을 원치 않았다. 독일어도 자기보다 못하는 엄마가 배우지도 않은 라틴어를 도와준다? 이해하기 힘들었겠지. 라틴어 선택 3주 만에 뜨거운 후회의 눈물과 함께, 예비시험에서 점수 4를 받은 아이의 기세가 보기 좋게 꺾였을 때였다. 그때가 내가 회유 정책을 펼 절호의 기회였다. 중간고사는 엄마가 한번 도와주랴?
5학년 때는 영어 선생님이 좋다고 취침 시간인 저녁 9시에도 혼자 영어 연습문제를 풀던 아이의 열정은 6학년이 되자 자취를 감추었다. 영어 선생님이 바뀐 탓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른 반 라틴어 선생님보다 엄하고 진도가 빠른 선생님을 만나 라틴어에 대한 의욕도 급속히 식었다. 그건 아니지! 아직 칼도 제대로 뽑지 않았다. 두부든 무든 잘라보기도 전 아닌가. 서예로 치자면 막 벼루에 물 붓고 먹을 갈기도 전. 우선 땅에 떨어진 아이의 자신감 회복이 급선무였다. 아이가 먼저 도움을 요청하게 하는 것도 중요했다. 시작은 약간 과장되게. 너 한국 사람이 얼마나 공부 방법을 잘 아는지 모르지? 세상에서 젤 잘 알아! (그게 사실이라면, 한국 사람은 모두 명문대 출신이어야 한다.) 엄마가 외국어를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 알아?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현재 구사하는 외국어는 일본어/영어/독일어 정도.)
아직 어려서 먹혔다. 아이가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순간부터 일사천리였다. 1과~5과까지 매일 라틴어 어휘를 반복해서 연습하게했다. 내가 라틴어로 묻고, 아이가 독일어로 답했다. 라틴어는 철자 그대로 읽기에 어렵지 않았다. 프랑스어, 이태리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루마니아 등 숱한 언어의 어원이라 영어, 독일어와도 비슷한 어휘가 많았다. 아이보다 내가 유리한 점이었다. 물론 처음 배우는 언어가 쉬울 리가 있나. 반복과 연습이 최고의 전략. 아이는 명사와 동사를 집중적으로 외웠고, 마지막까지 어려워한 건 부사 정도였다. 다음에는 텍스트를 읽고 라틴어 문장을 독일어로 번역하기. 라틴어 공부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라틴어는 죽은 언어, 즉 사어다. 라틴어 교과서에도 회화는 있지만 라틴어로 대화하는 나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우리로 치면 옛날 한자 비슷하다. 과거 시험을 위해 책으로 공부는하는데, 한자어로 대화를 한 건 아니니까. 라틴어 역시 옛 로마인들이 쓰던 언어로 지금은 가톨릭 미사나 라틴어 성경, 의학 용어 등 학술용으로만 남아 있다.
아이의 첫 라틴어 예비시험은 1)어휘 2)문법(동사 변화) 3)라틴어로 쓰인 복수 문장을 단수 문장으로 고치고, 독일어로 해석하기였다.
독일에서도 라틴어 수업은 점차 사라지는 추세라고 한다. 실용성이 떨어져 인기가 없다는 이유로. 김나지움에서 배운 후 졸업 하면 전공하는 사람 외에는 써먹을 일이 없으니까. 거기다 어렵다. 산처럼 쌓이는 어휘를 죽어라 외우지 않으면 포기가 답이다. 문법이라는 난관도 있다. 나는 처음부터 아이에게 못을 박았다. 문법은 혼자 할 것. 현재 독일에서 라틴어를 가장 많이 배우는 곳은 가톨릭이 센 바이에른 주다. 라틴어 대신 실용적인 제2 언어로 갈아타는 학교도 있지만 뮌헨의 아이 학교는 라틴어를 고수하고 있다. 각 반에서 라틴어를 선택한 학생 수는 1/4 정도. 중요한 건 라틴어가 아니다.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라니. 아이에게 약속했다. 낙제만 면해라. 대신 열심히 할 것. 열심히 하고 점수를 못 받는 건 용서됨. 반대는 안 됨. 이만큼 살아보면대충 안다. 열심히 하는데 안 될 리가 있나. 공부에 한해서 말이다.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시험 결과부터 말해야겠다. 아이는 중간고사를 그럭저럭 잘 친 것 같다. 시험 전날과 당일 아침까지 걱정을 하던 아이가 시험이 끝나자마자 점심시간에 학교에서 카톡을 보낸 걸 보면. 비록 아이의 한글은 맞춤법이 엉망이어서 엄마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시험 결과는 아직 돌려받지 않았다. 아이가 말하길 3은 아닐 것 같단다. 무슨 점수면 어떤가. 라틴어 수업과 라틴어 선생님을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게 된 것만 해도 어딘가. 거기다 하면 된다는 '한국형' 자신감과엄마에 대한 신뢰까지덤으로 얻었는데. 가장 좋았던 건 성취감. 공부에는 노력의 댓가가 반드시 따른다는 것. 라틴어야말로 머리 좋은 사람보다 성실한 사람이 이기는 정직한 과목 같다. 이러다 아이 입에서 라틴어가 가장 쉬웠어요, 하는 날이 올 지도 모르겠다.
지난주 아이는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5학년 때 못 간 것까지 합해서 5일로 꽤나 길었다. 즐겁게다녀오긴 했는데 돌아온 날은 몹시 지치고 피곤해했다. 당연하지, 집 떠나는 게 쉽겠는가. 여행을 가기 전 아이는 시험 때 외운 라틴어 단어들을 잊을까 걱정했다. 아이의 걱정을 덜어주려 출발 전에 연습을 해봤는데 거의 기억했다. 여행을 다녀온 후에도 아이의 머릿속을 차지한 건 애완 쥐들 반, 라틴어 반. 복습의 의미로 다시 연습하니 놀랍게도 80~90%를 기억했다. 나도 놀랐다. 벼락치기 공부를 해보면 알지만 시험 후에는 공부한 내용이 안개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나. 아이도 심했는지 일요일 오후에 어울릴 법한 어록하나만 던져놓고 친구인 한나 가족과 뮤지엄에 가도 되냐고 묻고는 줄행랑을 쳤다. '처음은 어려웠는데 지금은 친구 같아. 라틴어랑 조금 친해진 기분이야.' 엄마도 그렇다는 말은전하지도 못했다. 어찌나 급히 내빼시는 바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