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의 3월은 봄날이다. 보통 이 정도로 따뜻하지는 않았는데. 그사이 사하라 사막에서 붉은 모래 바람이 불어오기도 했다. 거기가 어디라고 이 먼 곳까지 모래가 날아오나.
카페의 테이블 위에 핀 봄꽃과 과일 뮤슬리.
3월부터 뮌헨의 한글학교가 대면 수업을 시작했다. 작년 가을이었나. 기억도 가물가물한 그때부터 뮌헨의 한글학교는 학부모들의 의견을 물어 지금까지 온라인 수업을 진행했다. 대면 수업은 3월의 두 번째 주말부터. 독일 카니발 파싱 Fasching 방학을 마친 후였다. 아이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찍 일어나야지, 씻어야지, 옷 입어야지, 간식 도시락과 물통도 챙겨야지. 온라인 수업 때는 수업 30분 전에 일어나 세수만 하고, 빵 한 조각 먹고, 윗옷만 걸치면 끝이었다. 지금은 1시간 전에 일어나 서둘러야 한다.
남편이 아이를 한글학교까지 데려다주고, 나는 학교가 끝나는 오후 1시에 픽업을 할까 했는데 바쁘시다고. 그렇다면 토요일 오전 세 시간을 적극적으로 즐기는수밖에. 첫 등교 때는 지하철 U반에서 처음 보는 한국 맘과 인사를 나누고 경쾌하게출발했다(그다음 수업부터는 지하철 공사로 두 코스를 걸어감). 아이가 교실에 올라간 후 학교 앞 카페로 출근. 4인용 테이블 사이에수줍게 놓인 2인용테이블에서 따끈한과일차를 주문. 신선한 과일을 얹은 뮤슬리도. 딱히 배가 고픈건 아니었지만 세 시간동안 차 한 잔만주문하기는 미안하니까.
빅투알리엔 마켓.
아이를 한글학교에 보내고 카페에서 쓰던토요일 오전의 글쓰기도생각난다. 어느덧 4년 전의 일이 되었다. 올해 3월 뮌헨의 날씨는 어쩜 이리도 좋은지. 4월 부활절까지는 추워야 정석인데. 학교가 끝나고나서 아이와 지하철 한 구간을 걸었다. 그 순간 해를 마주 보며 아이와 팔짱을 끼고걷는 일보다 즐거운 일은 없었다. 대로변의 차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아이의 재잘대는 소리만 새소리처럼귀를 간질일 뿐. 괴테 플라츠의 한국 식품점은 문이 닫혀 있었다. 3월 한 달이나 닫는다니! 한국 과자를 몇 개나 살까 아이는 기대에 부풀었건만. 두부와 콩나물을 사려던 나 역시 실망. 여기서 사려고 온라인 주문도 안 했는데.(한 달을 문 닫으면 가겟세는 어찌 내시나. 시도 때도 없는 나의이오지랖..)
괴테 플라츠에서는 우반을 타고 시내로 갔다. 한글학교에서 지하철로 세 코스면 뮌헨 시청 앞 마리엔 플라츠 역까지 갈 수 있다. 아이와 시청 앞 책방 후겐두벨에도 들렀다. 주말인 데다 날씨마저 좋아서 마리엔 플라츠에도 서점 안에도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렇게 사람이 많은 건 코로나 이후 처음 같았다. 그동안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업되는 느낌. 독일도 한국도 오미크론 확진자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지만 일상으로 돌아간 듯한 풍경이 반갑기그지 없었다. 빅투알리엔 마켓에도 봄기운이 만발. 마켓중앙의 비어 가든도 만석. 반가운 봄 아쉬운 봄. 잃어버린 봄 잃고 싶지 않은 봄, 사랑의 봄 사람의 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봄 흔들리고 방황하는 봄. 그게 봄이지, 그래야 봄이지. 정말 봄이 왔나 보다.
봄날 산책길의 카푸치노 한 잔!
점심은 빅투알리엔 마켓 옆 단골 베트남 식당에서 먹었다. 식당 주인 부부는 베트남 사람들이다. 만 여덟 살 딸과 만 네 살 된 아들이 있다. 그날은 딸아이만 식당 테이블에 혼자앉아 폰을 보고 있었다. 아이 옆 테이블에는 손님들이 늦은 점심을 먹고있는데. 몸집이 작은 아이의 모습에자꾸 눈길이 갔다. 우리 아이도 처음 뮌헨에 왔을 때 오전 수업을마치면 오후 내내 심심해했다. 춘삼월의 봄볕은 몹시도 곱고, 식당 밖은 사람들로 북적이는데. 주말도 없이 식당일을 하는 부모와 학교가 끝나면 부모의 식당에서 밤 10시까지 기다리는아이라. 오늘 저 애랑 우리 집에 가서 놀까? 아이도 같은 생각을 했던지 응, 하더니 금방 근심 어린 표정이되었다. 내가 동생이랑 잘 놀아줄 수 있을까? 그럼, 당연하지! 대답하면서도 궁금하긴했다. 그냥 믿어보는 수밖에. 아이들은 놀면서 친해질테니.그리고 걱정은 필요 없었다.
처음엔 둘 다 쑥스러워했다. 이럴 땐 언니 쪽이 다정하게 말을 건네거나 동생 쪽이 착착 붙거나 해야 하는데. 분위기 쇄신을 위해 카페 이탈리 Etaly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자고제안한 건 나. 아이스크림 싫어하는 아이는 못 봤으니까. 매일 아침 카페 이탈리에서 글을 쓰던 날들이 있었다. 지금은 맛볼 수 없는 달콤한 크림 크루아상과 이태리 정통 크리미 카푸치노를 마시던 꿈같은 날들. (늘 하는 말이지만, 암환자는 설탕을 가장 멀리해야 한다.) 넓은 카페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빈 테이블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책 코너에서 이태리 요리 책을 보며 둘의 간격이 줄어드는 것을확인후 귀가. 집에 와서는 아이 방에서 저녁까지 놀았다. 두 아이의 웃음소리가 복도를 지나 부엌에까지 날아왔다.
뮌헨의 우리 동네에도 첫 벚꽃 피고!
아이들처럼 수줍게 핀 이자르강 산책로의 꽃들. 앞은 개나리. 뒤는 모르겠음.
주말엔 우연히 우크라이나 가족을 산책길에서 만났다. 아이의 친구 한나네에서 지내게 된 가족이었다. 온화한 봄날의 일요일 오후에 로젠 가르텐 앞을 지날 때였다. 우크라이나 가족은 젊은 엄마와 네 살 남자아이였다. 아이는 자기 엄마 손을 꼭 쥐고 있었다. 고양이를 좋아해서 한나네 고양이 릴리를 밤낮 쫓아다닌다는 아이였다. 한가롭게 살던 고양이릴리는 질색을 해서 아이를 피해 도망 다니느라 바쁘시다고. 한나 엄마와 아빠는 평소처럼 밝고 편안한 모습이었다.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조차 없었다. 저 정도면 사람의 가면을 쓴 천사들이라봐야겠지. 모든 중생이 해탈하기 전까지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약한 보살들이거나.남편이 산책길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쏘았다. 아이스크림을 먹지도 않았는데 산책로의 공기가 달았다.
요즘 한나 엄마 아빠는 정신없이 바쁘다. 우크라이나 가족도 당분간 한나네에 머물기로했다고한다. 우크라이나 피난민들을 위한 외국인 거주 등록, 건강보험 신청, 아이를 위한 유치원 등록, 아이 엄마를 위한 독일어 교육과 이후 직업 교육까지 복잡한 행정 절차를 우크라이나가족과 사는 독일 가족이 도와주어야 하기 때문에. 생각만해도 보통 일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며칠 전 첫 번째 미션인 외국인 거주 등록을 하러 갔다가 12시간이나 줄을 서야 했다고. 그 말을 하는 한나 엄마 카타리나의 목소리가 밝고 맑았다. 그속에 짜증은 먼지만큼도 없었다. 내가 소리쳤다. 아이고, 그럴 때는 나를 불렀어야지! 줄 서기정도는 나도 도울 수 있다고!
빅투알리엔 마켓.
지난주 아이는 학교에서 우크라이나 난민촌으로 보낼 생활 용품을 사 올 사람? 묻는 담임 선생님 말에 주저없이 손을 번쩍 들었단다. 다음날 아이의 친구 메를레 엄마가 푸른색 이케아 큰 가방을 두 개나 가득 채워 학교에 들고 와서 활짝 웃으며 이건 시작이야! 라고 말했다며. 엄마, 우리도 빨리 사서 학교에 들고 가자. 저녁을 대충 먹고 남편과 셋이 대형 천가방을 찾아들고 집을 나섰다. 학교에서 준 목록은 총 10가지. 아기 기저귀, 생리대, 칫솔, 치약, 보디 크림, 비누, 밴드, 일회용 비닐장갑, 배터리, 마스크. 남편이 불룩해진 빨간 보따리를 산타처럼 어깨에 둘러메고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 아이는 파파에게 아이스크림을 얻어먹었다. 다음날아침은 내가 운전을 했다. 네비게이션인 남편은 옆에, 아이와 아이 친구 율리아나는 뒷좌석에,아이들 사이에는 빨간 가방을 놓고.
오늘은 아이와 한나를 데리고 가라테(공수도) 수업에 왔다. 둘 다 운동을 싫어한다. 체력이 국력이라는데 아이는 학교에 다녀오면 늘 피곤하단다. 그 나이에 벌써 '피곤'하다니! 뭐라도 운동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태권도는 한국에 있을 때도 하기 싫어했고, 구기 종목은 운동 신경이 안 따라주니 자신이 없다 하고, 배드민턴이나 탁구도 도무지 공을 못 맞춘다. 같이 해보면 코메디가 따로 없다. 공은 공대로 채는 채대로 따로 국밥. 정신 건강에는 참 좋다. 보고만 있어도 눈물이 나도록 웃겨서. 고심 끝에 합기도나 공수도를 제안했다. 한나 엄마는바쁘니 내가 두 아이를 데리고 왔다. 혼자는 안 한대서 둘을 굴비처럼 엮었는데일단 성공한 거 같다. 전날 저녁 아이는 혼자서 발차기 연습을 열심히 하더니 넘어지기도했다. 그것도 뒤로. 공중에서 두 발 돌려차기를 한 것도 아니고 단지 한 발을 든 것 뿐인데. 그렇게 넘어질 수도 있다는 게 놀라웠다. 운동이 끝나면 피자를 먹으러 갈 생각. 첫 가라테 수업이 어땠는지는 피자를 먹으며 들어봐야겠다. 궁금하시겠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