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도 다 가고 있다. 열두 달이 있다는 건 얼마나 축복인가. 일 년에 열두 번의 기회가 온다는 뜻. 세월호 8주기와 세계 책의 날과 사월. 우리 집의 빈 화분에는 팬지꽃이 피어나고, 뮌헨의 이자르 강 로젠 가르텐에는 목련이 지고 있다.
내게 세계 책의 날(4.23)을 기념하는 세 권의 책.
한글학교에서 함께 도서관 봉사활동을 신청하며 알게 된 이가 있다. 그녀도 나도 뮌헨에 온 지 만 4년이 지났지만 서로의 얼굴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반 2년은 글쓰기와 알바에온통 신경이 집중되어 한글학교 봉사는 뒷전이었다. 후반 2년은 코로나와 암 투병으로 모든 활동이 강제 중지. 그리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별일 없던 날들의 귀중함. 건강했던 시절의 소중함. 후회는 항상 뒤늦게 온다. 늦게라도 알아챘으니 다행이라고 봐야하나.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이라도 어찌어찌 막아보려면.
한국 가정인 그녀는 둘째인 아들성민이를 데리고 한글학교에 왔다. 아들은 우리 아이보다 한두 살이 어렸다. 누나도 있다고 했다. 오호! 내 관심은 본 적도 없는 그녀의 딸에게로 옮겨갔다. 외동을 키우다 보면 그렇게 된다. 좋은 부모를 보면 아이들에게도 관심이 가고. 혹시 딸은 없으시나. 우리 아이와 친구라도 하게. 한글학교에 오는 날 두어 번 차를 마시다가 가족끼리 얼굴이라도 한번 보는걸로 발전했다. (이런 게 내가 생각하는 한국인의 미덕이다. 너무 빨라서 문제라고? 일단은 만나봐야 알지.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오래갈 관계인지 아닌지. 신중은 그다음에도 늦지 않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나. 남편이 토요일마다 일을 하러 가서 좀처럼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예전처럼 토요일에 차로 한글학교까지 모셔다 주는 호사는 물 건너간 지 오래. 부활절 방학에 날을 잡아보기로마음먹었다. 우리 남편이 아이언맨도아니고, 일요일 하루는 쉬어주어야 하니까. 그녀와 조율 후 방학 마지막 날에 우리 집에서 두 가족이 만나기로 했다. 날도 흐리고 비 소식도 있어서. 독일 사람도 아닌데 티타임은 좀 그렇잖나. 주말 점심으로 역시나 피자만큼만만한 게 없다. 우리 동네엔 피자와 쿠헨이 연중 공수되는 마녀 카페가 있으니까! 남편이 직접 요리하는 수제 라자냐도 메뉴에 첨가했다. 아이가 셋이라 인기가 있을 법하고,간만에 남편에게 폭풍 칭찬을 날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서.
부활절 방학 때 한국 가족 현경네가 선물한 튤립(왼쪽). 부활절 때 우리 집에 들렀던 한국 가족의 딸이 직접 골라왔다는 화분(오른쪽).
그녀의 남편이 한국분이시지만 우리 남편과 마찬가지로 엔지니어에 영어도 잘하셔서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대가 되었다. 관심 분야가 같아야 얘기가 된다. 남자들은 특히 그렇다. 여자들이야 얘깃거리가 마를 날이 있을 리 없다. 남편들 얘기, 아이들 얘기, 우리 자신에 대한 얘기, 하다 못해 창밖으로 고개만 돌려도 대화의 아이템이 빨래처럼 늘려있다. 물론 비호감 상대와는 말 섞기도 싫지만. 일곱 난쟁이가 아닌 한 두 가족이 식사를 하기에는 부엌이 좁아서 아이들 셋은 우리 아이 방에 차려주었다. 우리 부엌의 직사각형 남티롤 혹은 스위스식 단단한 식탁에 어른 넷이 둘러앉으면 얼마나 흡족하고 아늑하고 편안한지 아이들은 절대 모를 것이다.
그녀의 딸은 외모가 단정하고 수줍은 편이었다. 우울하거나 어둡지는 않았다. 인상이나 성격이 우리 아이와 비슷해 보였다. 나이는 몇 살 위지만 그게 대수인가. 비슷한 성향의 아이들은 편안함을 느낄 가능성이 크다. 다른 성향의 아이들은 끌리긴 해도 어느 한쪽이 피로도를 느낄 가능성이 크고. 피자와 라자냐를 가져다주며 분위기를 보니 고요의 바다. 누나들이 가만있으니 동생도 눈치만 살폈다. 식사는 그렇게 끝나고 멍석은 엄마들이 깔아주기로. 아이들이 다 보드 게임을 좋아하고, 우리 집에도 보드 게임이라면 빠지지 않게 소장 중이었다. 후식으로 쿠헨을 가져다주며 보니 방 안의 공기가 훈훈했다.
전날이 세계 책의 날이었다는 걸 떠올린 건 그녀의 딸이 내 책꽂이에서 <돈키호테>를 보고 조용히 환호하는 것과, 집을 떠날 때 그녀의 엄마를 통해 <햄릿>을 빌려보고 싶다고 의사를 밝혔을 때였다. 그녀의 딸이 글쓰기를 즐긴다는 것도 그날 들었다. 오, 햄릿을 빌려달라는 16세 소녀라니! 내 마음에도 훈풍이 일었다. 그녀가 찜한 건 열린 책들에서 나온 햄릿. 물론 나는 여러 번역서들을 가지고 있다. 이 어린 친구에게 햄릿이 어떻게 다가갈지, 그 나이에 첫 글자인 햄도 몰랐던 내겐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녀의 딸이 관심을 보인 두 대문호가 사망한 지 400년 하고도 6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그들이 동시에 사망한 날을 세계 책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그날 밤 두 문호의 책과 또 한 권의 책을 서가에서 빼서 침대로 들고 갔다.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오래전 세계 책의 날에 세계 문학과 상견례를 했던책. 친정에서 3년 육아를 마치고 부산에서 서울로 상경하는 내게 우리 샘이 선물로 주시던 책. 첫 세계 문학 강의를 듣고 가슴이 벅차오르던 감격을 안기던 그 해 사월의 그 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