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아버지 날에 영화를 보았다

영화 <Top Gun>

by 뮌헨의 마리


바쁜 한 주였다. 주중의 공휴일과 주말에는 양쪽 어머니를 찾아뵙고 왔다. 아버지 날 기념으로 영화도 보았다. 톰 크루즈도 영원하지는 않더라.


아버지 날 기념으로 본 영화는 <Top Gun 2(2022)>. 공식 상영사미틀 전 오리지널 특별 공개편으로 보았다.



독일에는 아버지 날이 있다. 매년 날짜는 바뀌지만 주로 5월이다. 날짜가 바뀌는 이유는 부활절로부터 40일째인 예수 승천일을 아버지 날로 정하고 있는데, 부활절 날이 해마다 바뀌기 때문이다. 다만 항상 공휴일이고 목요일이다. 올해 독일 아버지의 날은 5.26(목)이었다. 어머니 날은 매년 5월 둘째 주 일요일. 아버지 날에는 무슨 선물을 할까? 아이들은 주로 카드를 쓴다. 독일은 아버지 날에 남자들에게 자유를 주는 모양이다. 남자들끼리 비어 가든이나 바에서 맥주를 마시며 즐기는 날 그런 느낌. 그것도 나름 의미가 있어 보인다. 결혼 후에는 칼퇴근과 함께 바른 귀가가 정석이기 때문. 회식? 그런 거 없다. 야근? 가정에 문제가 있는 걸로 오해받는다.

그날은 독일 친할머니 댁에 갔다. 친할머니 카타리나의 반응도 비슷했다. 우리한테 온다고? 남자들끼리 한 잔 하러 가는 게 아니고? 오호라, 감 잡았다. 독일 아버지 날의 의미는 그렇단 뜻이군. 아이는 전날까지 카드 쓰기를 미루다가 당일 아침에 늦잠을 자는 척하며 방문을 닫고 열심히 카드를 만들고 썼다. 그림은 엄마에게 미루었다. 자기는 할아버지께 드릴 카드도 써야 한다고. 내가 그리는 그림 레퍼토리는 똑같다. 토끼 가족. 파파 토끼는 맨 가운데 그려주고. 할아버지께도 카드를 쓰자는 생각은 내가 했다. 이런 카드는 손녀에게 받는 게 제일 무난하다. 아이는 이걸 왜 자기가 써야 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유를 모르면서도 엄마 말에 따라주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이 아닐까 싶다.



할아버지와 파파에게 쓴 아이의 <아버지 날> 카드. 가운데는 카타리나 할머니의 정원.



아버지 날 전날 저녁에는 파파의 제안으로 셋이 영화관에 갔다. 다음날이 아버지 날이라 뭐든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싶었다. 제목을 말해줬는데도 새겨듣지 않아서 무슨 영화인지도 몰랐다. 보나 마나 액션! 당일에야 톰 크루즈 주연의 <Top Gun 2>이고, 독일에서는 드물게 더빙이 아닌 오리지널 버전에 독일어 자막이라는 걸 알았다. 아이가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덤덤했다. 영화관에 도착해서 아이가 좋아하는 슈퍼 사이즈 팝콘부터 샀다. 영화가 시작되었고, 우리의 영웅 톰 크루즈도 나왔다. 얼마 만인가. 미션 임파서블을 본지도 오래. 톰 크루즈도 늙는구나. 그래도 멋지군. 속으로 감탄하며 보다가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부지런히 팝콘을 먹으며 스크린을 바라보는 아이에게 귓속말을 했다. "미안, 오늘은 독일어가 아니고 영어래." 아이의 반응에 더 놀란 건 나. "그래? 난 몰랐는데?"


영화가 끝나고는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따뜻한 오월의 밤이었다. 이자 토어에서 다리를 건너고 도이치 뮤지엄을 지나 이자르강 산책로를 따라서 걸었다. 아이는 영화를 얼마나 알아들었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는 엄마에게 아이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한 50~60%?" 아이의 대답을 듣고는 잡고 있던 남편의 손에 힘을 주었다. 대박 아니야? 앞으로 자주 볼까? 오리지널 버전으로. 이런 사인과 함께. 그럼 나는 얼마나 알아들었을까? 잘해야 30%. 그럴 밖에. 영화란 게 예의 바른 대화가 아니다. 일방통행. 속사포로 떨어지는 폭포수 같다. 인정사정없고. 자막은 볼 시간도 없고. 정신도 없고. 차라리 다 포기하고 영화의 흐름에 귀를 맡기는 게 낫다. 순리에 따르라. 눈치와 통박은 죽지 않으리니.


집에 돌아온 아이가 씻고 침대로 가며 슬쩍 던졌다. "내일 학교 안 가면 안 돼?" 이럴 때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게 최고다. "안 돼! 친구 따라 할 생각 하지도 마." 얼마 전 한나는 자기 엄마가 잘라준 머리가 너무 짧다고 울고불고하다가 다음날 학교를 하루 쉬는 조건으로 마무리를 한 적이 있다. 영화를 본 지 하루도 안 지나서 톰 크루즈의 대사를 요긴하게 써먹을 줄 내 어찌 알았으랴! "그냥 가,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말고!" 돌아서는 엄마의 귀에 아이의 낮은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방 천장 구석에서 작은 거미인지 거미줄인지를 보았다고 했다. 눈도 좋구나. "무서워!" "내년에 한국 가면 거미보다 더 무서운 걸 보여줄게" "뭔데?" "바퀴!" 대답을 들은 아이가 피식 웃었다. 오홋, 네가 바퀴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나 본데. 그게 아니란다. 그럼, 뭐? 거미보다 무서운 건 따로 있으시다고. 정답은 바로바로, 엄마! 에구머니나...



힐더가드 어머니와 도나우 강변 작은 호숫가를 산책하다 만난 강아지.



공휴일인 아버지 날과 연이은 주말에는 레겐스부르크의 힐더가드 어머니께도 다녀왔다. 이렇게 바빠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강행군. 삼월 이후 첫 방문이었다. 도착 날인 토요일 저녁에는 이태리 식당 <라 곤돝라>에서 저녁을 먹었다. 피로해서인지 맛을 잘 몰랐다. 내게는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어머니 집으로 돌아와서는 여름 여행 계획을 세우고. 어머니가 영국을 일주하는 크루즈 여행에 우리를 초대하신 것. 이 여행 때문에 한국은 못 가게 되었다고 아이는 좋아하지 않지만 뭐 어쩌나. 우선 감사드리고, 어머니 혼자 가시면 안심도 안 되니 함께 가는 게 낫겠다 생각했다. 재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오로지 감사한 마음으로. 우리가 언제 이런 크루즈 여행을 해보겠냐고.


토요일 밤에는 남편도 나도 졸리는 눈으로 어머니와 늦게까지 TV 축구 경기를 보았다. 레알 마드리드 vs 리버풀. 결과는 1:0으로 레알 마드리드의 승리. 남편도 나도 축구에는 관심이 적어서 졸다가 보다가 했다. 축구에 진심이신 어머니는 열성팬답게 적극적인 리액션으로 경기를 관람하셨다. 경기가 끝나자 우리는 초주검, 어머니는 생생. 일요일엔 레겐스부르크에 마라톤 경기가 있었다. 아침을 먹고, 어머니와 넷이 보드 게임을 하고, 집 밖에서 마라톤도 구경하고, 도나우 강변으로 산책도 다녀왔다.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준비하는데 갑자기 검은 먹구름이 몰려오는가 싶더니 콩 볶는 소리와 함께 쏟아지던 우박! 마라톤은 어찌 됐을까. 점심을 먹고 나자 날이 개었다. 그렇다. 영원한 것은 없다. 있을 리가 없다. 독일의 날씨만 봐도 안다. 어머니 거실에 놓인 가족사진 속의 지난날들을 봐도. 우리는 변하고 변하고 또 변한다. 10년 후에는 또 지금을 그리워하게 되겠지. 그러니 사는 거다. 그냥. 과거도 미래도 생각하지 말고.



글쎄 멀쩡하던 하늘에서 구슬 같은 우박이.. 힐더가드 어머니 거실에 있는 사진 속의 가족 사진. 연말까지 저 정도로 머리를 기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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