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앞두고 아이도 나도 한국이 가고 싶어서 별짓을 했다. 개학을 한 주 남기고 K드라마를 보기로 한 것. 긴긴 여름방학.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한 편도 안 보고 지나면 섭섭하지. 그런 심정으로. 향수도 달래고. 늘 그렇듯 선택은 어려웠다. 드라마가 오죽 많아야지. 고심 끝에 넷플릭스에서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골랐다. 다행히 아이와 내 취향에 꼭 맞았다. 많이 웃고 감동하고 울고. 사흘 내내 새벽까지 보았다. 마지막 날 아이는 결말이 마음에 안 들어 속상해함. 드라마인데 왜 다시 만나지 않느냐고. 나도 조금은 서운했지만 드라마답지 않게 현실적인 결말이 신선하기도했다. 아이 앞에선 못 밝혔지만.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지. 그래야 첫사랑이지.아닌가?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보다 눈이 가는 조연을 만났다. 전교 1등인 고등학교 여학생. 그 나이에 사는 게 재미없는 걸 알아버린청춘 (나도 비슷한 이유로 알바를 간다). 고전을 읽을 때도 그런 캐릭터들이 있다. 문학에서 가장 인상 깊은 조연은 누가 뭐래도 이아고겠다. 이간질로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파멸로 이끈.나쁜 친구의 대명사쯤 되겠다. 내게도 마음 아픈 두 명의 조연이 있다. 까뮈의 <이방인>에 등장하는 주인공 뫼르소의 여자 친구 마리 Marie. 남자 친구도 잘 골라서 사귀어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녀의 남은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걸까. 다른 한 명은 조지 엘리엇의 <플로스강의 물방앗간>에 나오는 여주인공 매기의 오빠 톰. 모든 것을 주체적으로 갖게 되는 여동생 매기에 비해 아무것도 갖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는 그의 인생 앞에서 가슴이 찢어질 뻔했던 기억이 있다. 조지 엘리엇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꼭 그래야만 했냐고.
해럴드 블룸의 독서 기술.
인생이 시들하거나 한국이 너무 그리울 때 읽는 책도 있다. <해럴드 블룸의 독서 기술 HOW TO READ AND WHY>같은 책. 고전을 왜 읽는가, 라는 상투적인 질문에 고품격으로 답하는. 그런 책 읽기를 좋아한다. 그가 논하는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와 제인 오스틴과 프루스트와 토마스 만을 읽어보시라. 그들의 소설을 읽는 것만큼 고전의 향기에 빠져든다. 예를 들면 프루스트 편.
프루스트가 지닌 치유의 힘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 50년 전처럼 소설을 읽으며 자신을 완전히 몰입시키며 읽을 수 없다.나의 첫사랑은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실제 소녀가 아니라 토머스 하디의 <숲 속 사람들>에 등장하는 마티 사우스였고, 그녀가 아름다운 머리 카락을 잘라 팔려고 내어놓았을 때 나는 몹시 슬퍼했다. 여주인공과, 그리고 그녀가 등장한 작품과 사랑에 빠지는 일이 주는 현실감에 버금가는 경험은 찾기 어렵다. 나이가 드는 것은 프루스트를 이해하는 깊이로, 그리고 프루스트에 의해 깊어지는 정도로 측정할 수 있다. 소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 작품이 우리의 애정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 판명되면, 애정을 가지고 읽는다. 또한 질투심을 가지고 읽는다. 왜냐하면 소설은 우리가 가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나타내는 형상이 될 수 있지만, 더욱 풍부한 삶이라는 프루스트적인 축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추석은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너무 이른 때 뜬금없이 찾아와 추석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도 안되어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독일 바이에른이 독일의 16개 주 중에서도 가장 늦은 7월 말에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9월 둘째 주 화요일(올해는 9.13)에 개학을 하기 때문이다. 여름방학에 추석이라.. 이런 황망한 기분 이해되시는지. 추석이라고 해서 뭘 특별히 차려먹거나 하지는 않는다. 이번 추석엔 알바를 하는 한국 슈퍼에서 떡을 나눠주셔서 명절 기분이 조금 더 났다는 정도. 여러 가지 떡 중 아이와 내가 고른 건 인절미였다. 우리는 둘 다 떡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나마 좋아하는 건 절편과 인절미. 속이 단 건 사절.
그 고수 나물. 저게 어디 미나리인가!(어떻게 미나리가 아닌가!!!)
소나기 얘기가 나온 김에 얘긴데, 나는 독일의 날씨를 좋아한다. 믿기지 않는 분도 계시겠지만 사실이다. 날씨 중에서도 독일의 '소낙비'를 무지 좋아하는데 없는 낙관주의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독일의 소낙비는 오래 내리는 법이 없다. 길면 1-2시간. 보통은 30분 이내. 검은 먹구름이 몰려들다 공기에 금이 가듯 빗살무늬가 좍좍 그어질 때는 가까운 처마 밑이나 조금 더 마음의 여유가 있는 분들은 카페에라도 뛰어들어가 차를 드시길. 그사이 빗줄기가 약해지거나 멈추거나 심지어 해까지 나오는 신묘함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 얼마나 바람직한가. 여기에 우울할 틈이 어디 있나. 아무리 세찬 비도 곧 멈춘다는 걸 아는 신통방통함.
추석 음식 말도 나와서 하는 말인데, 추석엔 뭘 먹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송편? 송편은 안 좋아해서 천만다행이고. 추석상에 올라오는 생선과 나물은 당연히 그립고. 그래서 먹은 게 고수 나물이다. 고수가 나물이냐고? 사정은 이렇다. 아시아 숍에 갔더니 미나리 비슷한 채소가 보였다. 한 단을 사 와서 다듬고 데쳤다. 데치는 순간 향으로 고수란 걸 알았을 때의 황당함. 아, 이걸 먹나 마나. 데친 고수를 물기를 짜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은 아이의 방학 마지막 날. 고수도 나물이 못 되란 법이 있나. 쓴 나물이 몸에도 좋다는데. 버리긴 아까우니 간장, 참기름, 깨소금만 넣고 무쳤다. 어라, 생각보다 먹을만하더라는. 이것이 추석에 고수 나물을 먹은 이야기. 고수를 많이 먹으면 삶에도 고수가 될까. 그럴 리가.그래도 다시 먹어볼 생각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