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집으로 오는 산책길 입구에서 만난 가을꽃! (저 황홀한 색을 무슨 색이라 불러야 하나..)
"엄마, 내년엔 구독자 2,000 가자!"
항암 치료를 핑계로 매주 한 편씩 올리던 글을 2주 가까이 못 올리다 김치와 장아찌에 대한 썰로 가까스로 글을 올리고 딸에게 보여주니 딸이 김치와 장아찌 사진은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구독자 수를 자세히 보며 그렇게 말했다. 구독자 2,000 이 장난이냐, 싶었지만 그래, 쿨하게 대답했다. 지금 내 구독자는 1,649명. 브런치를 시작한 지는 4년 4개월째다.
아이에게 말하진 못했지만, 아이의 말을 듣고 내 생각은 달랐다. 페이스북도, 인스타그램도, 트위터도, 블로그도 하지 않은 내가 구독자를 늘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오직, 일편단심 브런치뿐이니까. 그보다는 1,950,000 이 넘는 조회 수가 2백만을 돌파하는 게 빠르지 않을까 싶었다. 쑥스럽긴 해도 그때는 브런치 구독자님들과 자축을 해야지. 글쓰기도 기분이니까!
만 열두 살인 딸은 내 브런치의 구독자다. 그런데 보나 마나 엄마 글을 읽지는 않을것이다. 아마 제목만 보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요즘엔 그마저도 의문이다. 과연 제목을 읽기는 할까. 라이킷만 누르고 냅다 튀는 건 아닐까. 지금까지 올린 글은 총 683개. 뻔뻔하게 어느 날은 이런 부탁까지 했다. 내 글이 1,000개가 되는 날, 그 천 번째 글은 반드시 자기에 대해 써야 한다고. 그때도 그러마 했지만 기억이 안 나긴 지금도 마찬가지. 자신의 무엇에 대해 쓰라고 했는지 말이다.
"엄마 글을 읽기는 하냐?" 내가 물었다.
"아니, 안 읽어!" 어쩜 이리 당당한지. 갑자기 열받는다.
"엄마 글이 어렵냐?"
"한글로 쓴 글은 읽어도 느낌을 잘 모르겠어."
"그럼 지금까지 하나라도 읽었냐?"
"있지! 골디에 대한 글.."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얼굴에 부듯함과 쓸쓸함이 반반이었다. 골디는 우리 집에 와서 1년 만에 죽은 애완 쥐 이름이다.
"그건 괜찮았어?"
"응, 좋았어!"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하나라도 읽은 게 어딘가. 딸과 이런 대화를 한국어로 한다는 것도!
가을 방학이 끝나고 라틴어 중간고사에서 딸은 6을 받아왔다. 그날은 남편에게 딸과 딸의 친구 한나를 가라테 수업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 날이었다. 한국 슈퍼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오자 남편과 딸도 도착했다. 반갑게 아이를 안으려는데 아이가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 미안해.." 두 눈에는 눈물이 한가득. 이건 뭐지.. 아, 라틴어! "너 라틴어 점수, 못 받았구나!" 아이가 고개를 떨군 채 나와 눈을 맞추지 못했다.
옛날 같았으면,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을 것이다. 대체 6이 뭐냐고, 그럼 낙제 아니냐고, 꼴통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6을 받을 수 있냐고. 물론 충격을 받긴 했지만 침착해야 했다. 아이를 벼랑 끝으로 몰면 안 되니까. 6을 하나라도 받으면 낙제인 건 사실이지만 아직 학기 중이니 만회할 기회는 있을 것이다. 아이에게 가능성을 물으니 중간고사 전에 쪽지 시험에 두 번 3을 받아서 플러스가 될 거라고 했다. 과외는? 진작부터 받으라고 했건만. 그것도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어제저녁부터 아이와 라틴어 어휘 연습을 시작했다. 아이가 정식으로 부탁했다. 혼자서는 잘 외워지지가 않는다며. 하루에 한 과씩 하기로 했다. 30분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어제는 아이의 열의가 넘쳐나는 바람에 1시간이나 했다. 갑자기 단어 시험을 칠 수 있어서 라틴어 선생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나. 아이는 이번 7학년에 새 라틴어 선생님을 만났다. 6학년 때 만난 첫 라틴어 선생님처럼 스파르타 식이 아니고, 라틴어로 힘들어하는 아이들의 심정을 이해하시는 분 같았다. 쪽지 시험에서 6을 받은 아이에게는 단어 구두시험에서 점수를 후하게 주시고, 중간고사에서 대형 사고를 친 우리 딸에게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아끼지 않으셨다고.
어제저녁 아이는 라틴어 어휘를 충분히 연습한 후 의기 충만해서 침대로 갔고, 오늘 아침에는 다시 명랑하게 학교에 갔다. 엄마가 화내지 않으니 안심이 됐는지 자기는 다 잘하는데 라틴어만 이 모양이라 속상하다고 셀프 칭찬까지 해가며. 속으로는 웃음이 났지만 진심으로 들어주고 맞장구까지 쳐주었다. 실수도 할 수 있고 실패도 괜찮다. 다시 일어날 수만 있다면. 다시 도전할 용기만 있다면. 나도 그랬다. 어떤 순간에도 끝이란 건 없다. 암에 걸린다 해도 또 다른 선택지가 있을 뿐. 그 역시 삶의 일부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기로 했다. 내 딸도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