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도 라틴어와 한 판 승부

눈도 없는 스키 여행을 다녀와서

by 뮌헨의 마리


아이의 공부 계획표.



아이는 뮌헨의 김나지움 7학년이다. 독일의 초등학교는 4년제. 인문계 중등 과정인 김나지움은 5학년부터 시작한다.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합쳐진 형태로 5학년부터 7학년까지가 저학년. 8학년부터 10학년까지가 중간 학년. 11학년부터 13학년까지가 고학년이다(원래 12년 학제였다가 우리 아이 때는 13년 과정이고 이후 다시 12년 제로 돌아간다. 안 그래도 늦게 낳은 애가 학교도 1년 더 다녀야 한다는..).


독일의 새 학기는 9월이다. 여름 방학은 길고, 겨울 방학은 짧다. 여름 방학은 6주, 겨울 방학은 2주. 크리스마스부터 새해 첫 주까지. 우리 아이가 다니는 김나지움은 7학년이 총 네 반이다(일반 3+ 영재반 1. 우리 아이는 영재반은 아니다). 한 반은 30명 정도. 남녀 공학이고 아이 반은 남학생들이 더 많다(남녀 비율은 12:19). 3년 내내 같은 반 아이들과 올라가다가 8학년 때 바뀐다. 8학년으로 올라가기 전에 각각 친한 친구 이름을 2명씩 적어내서 같은 반으로 배정해 준다고 한다. 아이는 베프들과 총 4인방인데 어떻게 해야 네 명이 같이 올라갈지 넷이서 머리를 짜고 있는 모양이다. 아직 학기가 반년이나 남았는데도!



김나지움 라틴어 교재(6학년+7학년).



담임 선생님과 교과 선생님들은 2년마다 바뀐다. 가끔 1년 만에 바뀔 때도 있다. 6학년 첫 라틴어 선생님이 그런 케이스였다. 우리 아이에겐 다행. 스타르타 식으로 1년 만에 첫 라틴어 교과서를 떼신 분이다. 생각해 보시라. 외국어 첫 교재 25과에는 기초 어휘와 주요 문법이 총망라되어 있다. 우리 아이는 결국 따라가지 못했다. 진도는 매주 무지막지 달리시지. 수업 때마다 단어 테스트를 하시지. 라틴어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아이는 좌절하는 것 같았다. 물론 라틴어를 선택한 모든 아이들이 그런 건 아니었다. 우리 아이가 언어에 약했던 탓이다.


참고로 각 반에서 라틴어를 선택한 아이들은 7-10명 정도. 나머지는 프랑스어를 택했다. 아이의 절친들도 모두 프랑스어. 진도도 적당하고 배우는 재미도 있고 다들 좋은 점수를 받아 아직까지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 그러나 프랑스어 역시 만만한 과목이 아니라는 썰도 들린다. 우리 한국슈퍼 사장님 큰 딸 하나도 뮌헨 공대에서 공부하는 수재인데 김나지움 시절 프랑스어를 떠올리기만 하면 치를 떨었으니까. 그녀의 남동생 티미도 거들었다. 우리 애한테도 꼭 전하라 했다. 프랑스어도 절대 막판까지 웃을 수 는 과목이 아니라고. 그 말에 우리 아이가 약발을 받았는지 어땠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이번 겨울 방학부터 또다시 의욕을 불태우더라는 것. 목표는 소박하다. 6만 받지 말자!(6 받으면 끝. 낙제 점수라서..)


요즘 나는 아이와 저녁마다 라틴어 단어 연습을 다시 하고 있다. 라틴어 어휘가 혼자서는 쉽게 외워지지 않는다고 해서. 성공의 열쇠는 내가 쥐고 있다. 기대를 완전히 버리고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알면서도 조절이 안 될 때도 있다. 묻는 내가 다 기억할 정도인데 애가 틀린 걸 계속 틀릴 때. 그럴 때는 마음을 접고 그날의 공부도 접는다. 계속하다간 나도 열받고 아이의 사기도 꺾이기 쉽기 때문에. 지난 토요일처럼. 라틴어 시험이 코 앞인데 친구 율리안나와 우리 집에서 파자마 파티를 하신다고. 친구가 와 있으니 공부에 집중이 될 리 없다. 일요일도 늦은 아침을 먹고 계속 놀길래 오후에는 친구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 공부에 집중하도록 했다. 애나 어른이나 때는 내일을 잊는 법이라서.



친구에게 줄 선물은 앨범과 편지. 나는 아이의 편지를 읽지 않았다. 당신도 읽지 마시길. 그럼에도 브런치에 올리는 이유는 먼 훗날 지금 이 순간을 잊을 아이에게 주는 엄마의 선물.



올해는 1월 둘째 주에 개학을 하자마자 학교에서 1주일간 7학년 단체 스키 여행을 갔다. 12월에 내린 눈은 다 녹고, 기온도 영상인데. 그래도 취소가 안 되는지 여행은 떠났다. 두어 번 전화가 왔는데 트레킹도 하고, 스케이트도 타고, 치즈 공장 견학도 했단다. 스키를 못 탄 건 애석하지만 친구들과 즐거우면 그만이지. 우리로 치면 수학여행쯤 되겠다. 여행을 가기 전에는 연말부터 절친 생일 선물을 준비한다고 난리법석이었다. 초등부터 김나지움까지 5년 동안 친구와 찍은 사진을 뽑아서 예쁜 노트에 붙이고, 장문의 편지도 쓰고. 바야흐로 아이의 사춘기 소녀 시대가 문을 연 것이다. (친구가 뭐라고 저 난리인가 싶다가도,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좋은 친구가 있다는 건 무엇보다 든든한 일이더라. 기다려라 친구들아..)


지난 주말만 해도 라틴어 단어를 연습하다가 뚜껑이 열릴 뻔했는데, 전날엔 아이도 나도 의기충천이었다. 아이에게 이런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젠 공부가 재미있다고. 라틴어도 다시 해보겠다고. 지난 1년은 라틴어 때문에 학교도 싫고 공부도 싫다 했는데. 새로 오신 라틴어 선생님 덕분이다. 진도를 천천히 나가시니 우리 아이처럼 라틴어를 포기한 애들에게 다시 용기와 기회를 주신 셈이다. 오히려 예전에 라틴어를 잘했던 애들은 기를 쓰고 공부하지는 않는 분위기라고. 겨울 방학 직전에 아이가 국어인 독일어 시험에서 난생처음 2+를 받은 것도 동기 부여가 된 것 같다. 아이의 독일어 작문 시험은 늘 3이었다. 새로 바뀐 독일어 선생님은 긍정적이고 따듯한 분 같았다. 아이의 시험지에 적힌 피드백을 읽어보면.


한 가지 더 다행인 건 이번 겨울에 아이의 독일어 책 읽기 의욕이 되살아난 것이다. 5학년 때까지 책을 좋아하던 아이는 6학년 때 라틴어 압박 때문인지 손에서 책을 놓았다. 독서란 게 그렇다. 초조하고 불안하면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 크리스마스 선물로 책을 잔뜩 산 아이가 개학을 하고도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이것도 엄마의 바람일 뿐. 독서는 강요나 숙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책 읽기의 즐거움은 스스로 깨쳐야 성인이 되어서도 손에 들 테니까. 독서도 습관이라서. 김나지움 졸업 시험이자 대학 입학을 결정짓는 아비투어도 독서력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아이의 독일어 시험만 봐도 작문 시험이 거의 다였다. 오늘 아이는 다시 학교에 갔다. 스키 수학여행 후 2학기 공식 첫날이었다.



친구가 뭔가, 우정이란 뭔가를 되새기게 하는 아이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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