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Ann을 만난 건 오래전이다. 안은 평균 독일 남자 만큼 키가 크고, 안경을 쓰고, 이목구비나 목소리가 시원시원한 40대 여성이다. 우리는 정확히 5년 전에 뮌헨에 와서 처음 만났다. 안은 우리 윗집에 산다. 20여 가구가 사는 우리 건물에서 알고 지내는 몇 안 되는 이웃이다. 옆집과 맨 아래층 사람들과는 인사만 하는 정도. 대도시 삶이 어디나 비슷비슷하지 싶다. 한국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웃과 소통하고 사는 경우가 흔한가. 그러기엔 서로가 너무 바쁘고 피곤하다.
우리 아이가 초등 2학년이던 첫해는 자주 만났다. 돌아보면 그때가 가장 한가하고 좋았다. 학부모로서 말이다. 안의 두 아이들 중 아들 오스카는 초등 3학년이었고, 딸 루시는 애기였으니까. 그때만 해도 서로 잘 놀던 우리 아이와 오스카는 한 해 걸러 나란히 같은 김나지움에 갔고, 어느새 7학년과 8학년이 되었다.지금은 복도 계단에서 마주쳐도 인사는커녕 아는 체도 하지 않는사이로 둘 다 사춘기라는강가에 서 있다. 오스카는 만으로 열넷, 우리 아이는 2월에 열셋이 된다.
뮌헨에 온 이듬해부터 두 아이가 김나지움 진학 시험으로 초등 4학년을 정신없이 보내느라 자주 못 만났다. 그 무렵 나도 일을 한다고 2년 정도 바쁘기도 했고. 그리고 찾아온 코로나. 안은 이 시기에 오스카와 매일 싸웠다고 했다. 그녀가 말했다. 코로나 시절은 돌아보기도 싫을 만큼 끔찍했다고. 학교가 아닌 집에서 오스카는 마음 붙일 곳이 없어 방황했고, 혼자 공부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안은 학교에 상담 요청을 했다. 더는 엄마로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길을 잃었기때문이라고 안이말했다.
오스카의 성적은 떨어지고, 매일이 싸움의 연속이니 안의 마음이 오죽했을까. 점심시간이 짧아서 오스카 아빠 로버트의 역할에 대해서는 못 들었다. 학교 상담 샘이 안에게 그러더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를 몰아세우지 말라고. 아이 성적에 대해서도 잊으라고. 비록 낙제를 하더라도 말이다.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이다. 아이는 모든 것을 스스로 겪고 일어설 것이고, 좌절하고 실패할 때 엄마에게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아이와 관계가 나쁘면 최악의 경우 아이는 어디로? 이 말을 듣고 안은 마음을 내려놓았고, 지금은 싸우지 않는단다.
안의 마음을 철렁하게 만든 몇 가지 사례도 들었다. 안의 친구 중 하나는 딸이 청소년 여학생인데 거식증에 걸려 입원치료 중이었다. 너무 말라 생명이 위험할 정도라고. 또 한 친구는 청소년 아들을 두었는데 얼마 전 학교에서 투신자살을 했다 한다. 이유는 묻지 못했다. 너무 놀라고 정신이 없어서. 나 역시도 작년에 사춘기 문 앞에 선 아이에게 성적 때문에 몇 번 난리 치다가 깨달은 게 있다. 딱 두 가지였다. 지금 내 아이는 건강하다. 몸도 마음도. 감사하지 않은가. 지금 사이가 좋아야 사춘기가 지나서도 사이가 좋을 확률이 높겠지. 내 목표는 딸과 친구 되기라서.
안은 감자 뇨끼. 나는 매운 파스타 뻰네 아라비아따.
안과 다시 만난 건 2021년 여름 내가 항암을 할 때였다. 우리 남편을 통해 내 소식을 듣고 알고 있었지만 내가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이런 배려는 소중하다. 내 경우 암 진단 후 한 달 만에 수술을 받았지만, 다시 항암을 시작하기까지 약 5개월 정도가 걸렸다. 돌아보면 그 시간은 내가 암과 화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당연히 그 당시에는 누구와도 만날 기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안과 우리 동네 마녀 카페에서 만나던 때가 생각난다. 한 번은 항암을 도와주러 와 있던 우리 언니와 같이 만났고, 두 번째는 언니가 떠난 가을에 둘이서 만났다. 두 번 다 날씨가 좋았고 대화도 유쾌했다.
이번에는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있냐고 묻길래 이자르 강 다리 건너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이태리 레스토랑으로 정했다. 내가 전화로 내 이름으로 예약까지 했는데 직접 가보니 내부가 넓고 좌석이 많아서 예약은 필요가 없었다. 안은 전부터 그 레스토랑을 좋아한다고 했다. 처음 가봤는데 나도 좋았다. 월-금요일까지 매일 그날의 메뉴가 있는 것이 특히 좋았다. 선택은 파스타와 피자 각각 하나. 내가 가장 선호하는 스타일이었다(우리 한국슈퍼 점심 코너 임비스 Imbiss에도 적용하면 좋겠다고 늘 생각해 왔기 때문에). 메뉴가 너무 많으면 피곤하잖나. 특히 점심시간이 짧은 고객들을 위해서도 그날의 메뉴(2-3개)가 가장 효율적인 대안 같다. 준비하기도 간단하고, 고르기도 쉽고, 장사도 잘 되고, 일석 삼조.
우리에게 가장 핫한 공통 주제인 사춘기가 끝나자 이번에는 라틴어가 도마 위로 올라왔다. 다시 한번 안이 치를 떨었고. 자기도 김나지움 때 라틴어 때문에 피를 봤다고. 그래서 오스카에겐 프랑스어를 고르게 했는데, 문제는 오스카도 프랑스어에 치를 떨고 있는 중 같았다. 오늘은 우리 아이의 라틴어 중간고사날인데, 고사를 지낼 일은 없어 보인다. 열심히 하는 걸 봤기 때문이다(어젯밤에도 책상 위에 놓인 체크 리스트를 슬쩍 보았다. 아이가 직접 만든 건데 모든 항목에 체크가 되어 있었다!). 오늘 아침에도 책상에 앉아 있던데 정말 드문 경우였다.
그제는 단어 테스트에 점수 3을 받았다고 흥분해서 학교 마치자마자 전화로 알려주었다. 옛날 라떼로 보자면 딱 미에 해당한다. 그때만 해도 그닥 칭송받을 점수는 아니었는데 현재 아이의 라틴어로는 난공불락의 점수다. 어제는 오랜만에 멀리 남쪽에 사는 아이의 친구 레아마리 맘과도 연락을 주고받았다. 레아마리 맘과 나는 딸들이 라틴어로 힘겨워한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그러던 레아마리가 단어 테스트에서 점수 2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기뻐했다. 당연히 우리 집 숫자도 건너갔다. 다만 아이에겐 아직 친구집 숫자를 알려주지 않았다. 혹시 좌절할까 봐(레아마리야, 정말 잘했어!!!).
1시간 후 학교가 끝나면 아이는 전화를 할까?(자기가 잘했다고 생각하면 꼭 전화부터 하심.. 엄청 흥분해 가지고.) 전화가 안 와도 걱정은 하지 않을 것이다. 어학이 하루아침에 되는 건가. 우리도 해보지 않았나. 이번에 보여준 그 노력이면 충분히 칭찬받아 마땅하다. 안이 그랬다. 정말 도움이 필요하면 자기한테 말하라고. 자기가 잘 아는 라틴어 과외 샘이 있는데 30대 여성이고, 막 아기 엄마가 되었고, 라틴어를 무지 잘했고, 지금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이만하면 든든하지 않나. 지금 내 발등에 떨어진 고민은 학교에서 돌아올 아이에게 뭘 해줄까, 다. 파스타? 김치볶음밥? 김밥? 보시라. 각자의 숙제는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