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마지막 주말엔 밀라노에 다녀왔다. 뮌헨 시내 플릭스 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서. 토요일 아침 8시 출발. 놀랍게도 뮌헨발 밀라노행 플릭스 버스의 종착지는칸 Cannes이었다. 맞다, 영화제로 유명한 그 칸. (칸까지는 얼마나 걸릴까궁금해서 플릭스 버스 앱으로 검색해 보니 아침 8시 뮌헨 출발. 저녁 9시 15분 도착. 디렉트로 13시간 15분이 걸린다. 가격은 너무 착한 59.99유로. 만약에 내가 버스로 간다면 저녁 8시 차를 타야지. 저녁 8시 20분 출발. 다음날 아침 8시 50분 도착. 12시간 30분 소요. 안 힘들겠냐고? 글쎄, 힘은 좀 들겠지. 밤차 가격은 아침보다 조금 비싼 79.99유로. 아무려나 버스를 타고 칸까지 간다? 이럴 때 유럽에 살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1월 말 뮌헨의 아침 공기는 차가웠다. 출발 시간보다 30분쯤 일찍 도착해 여권으로 신분을 확인하고 버스에 올랐다. 국경을 넘는 플릭스 버스를 탈 때 여권은 필수. 외국인은 항상 여권을 소지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독일 영주권 카드나 신분증은 이태리에서 인증을 못 받는다. 오고갈 때 휴게소에는 두 번 들렀다(우리가 탄 플릭스 버스는 실내 화장실 사용이 금지였다). 뮌헨에서 밀라노까지는 오스트리아를 지나 북부 이태리 쪽으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오스트리아 지나 스위스 지나 밀라노로 들어갔다. 총 6시간 15분이 걸렸다. 도착은 오후 2시 15분.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운전사는 이태리 할아버지였는데 돌아올 때도 같은 운전기사였다. 버스 안에서는 집에서 싸 온 샌드위치와 과일을 먹었고, 가장 러시아적인 작가로 불리는 레스코프의 작품 <왼손잡이>를 읽었다.
뮌헨의 시내 중심에 위치한 플릭스 버스 Flixbus 터미널 ZOB. 플릭스 버스는 연두색이다(위&가운데). 밀라노 호텔(아래).
밀라노의 플릭스 버스 터미널은 북서쪽 외곽에 있었다. 지하철 메트로 1번을 타고 호텔로 갔다. 일곱 번째 역에 내려서 10분쯤 걸었다. 호텔은 오래된 수도원 같았다. 호텔 건물 한가운데에 있는 직사각형의 정원은 폭이 넓고 긴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호텔에 묵은 일행은 4명. 더블룸 1개와 싱글룸 2개를 예약하고 갔는데 체크인 때 더블룸을 트윈룸으로 변경해 달라 하니 장애인용 룸을 주었다. 덕분에 침실에 거실까지 딸려왔다. 트윈룸(123유로)과 싱글룸(111유로)의 가격이 큰 차이가 없었다. 호텔 체크인 때 젊은 이태리 여직원은 불친절했고, 다음날 체크 아웃 때 다른 직원도 마찬가지여서 조금 놀랐다.
조심하자! 이태리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다음날 트윈룸 체크 아웃을 하려는데 데스크에 있던 중년의 이태리 남자 직원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영어로 여행자 도시세가 두 사람에 'Eighty(80)'라고 했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내가 'Eighty?'라고 되물으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눈도 깜짝 안 하고. (미친! 도시세가 호텔비 수준? 인터넷으로 예약할 때 여행자 도시세에 대해 읽었는데, 당황하니 생각이 더 안 났다) 어이가 없어서 가만히 있었더니 슬그머니 영수증을 밀어주더라고.1인당 4유로*2명에 총 8유로라고 적혀있었다. 영수증에는 'Eight(8)'인데? 물으니까 이번에도 그렇단다. (아, 이태리.. 너 진짜..)
얘기가 나왔으니 하나만 더. 다음날 호텔을 나와 플릭스 버스로 돌아갈 때의 일이다. 메트로를 탈 때 몸집이 작은 여자 둘이 나를 뒤따라 타면서 내 핸드백에서 지갑을 슬쩍하려고 하는 걸 뒤에서 타던 J언니가 보고 소리를 질렀다. 이건 명백한 내 실수. 내 핸드백이 열려 있었던 거다. 이태리에서 동양 여성은 100% 타깃이 된다고 들은 건 밀라노를 다녀와서다. (백팩에는 귀중품을 넣지 말자. 여권과 지갑이 든 가방이나 핸드백은 앞으로 매자. 지퍼도 꼭 닫고. 기본 아닌가? 나도 참! 지갑을 구해주신 J언니께는 휴게소에 들렀을 때 샐러드로 보답함.) 참 잊을 뻔했는데, 밀라노 플릭스 버스 터미널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메트로 차표는 2.20유로다. 차표 사는 기계 옆에 집시처럼 보이는 남자가 차표를 준다고 덥석 받지는 말자. 내 손이 나가려 하자 재빨리 다른 J 언니가 저지하시는 덕분에 안 받았다. 나중에 보니 2유로에 파는 듯했다. 누가 쓰고 버린 차표일 가능성이 높음. 밀라노 시내에 도착하니 검표원들이 차표를 검사하고 있었다. 걸렸으면 벌금을 물 뻔했다. 언니들 아니었음 큰 일 날 뻔!
밀라노에서 줄 서서 먹은 수제 파스타집.
밀라노에 특별한 기대는 없었다. 애초에 기대했던 윤찬의 공연이 취소되고 대타 피아니스트가 나온 공연은 당연히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날 공연에는 한국인들도 많았다. 다들 비슷한 기대로 왔다가 비슷한 실망을 안고 돌아갔겠지. 티켓은 놀라울 정도로 쌌다. 1등석이 20유로. 인터넷 예약 수수료 조금. 이런 금액으로 윤찬의 공연을 볼 날이 얼마나 있을까. 없을 것이고 없었으면 한다. 공연을 본 후에는 밀라노를 잘 아는 J의 소개로 줄 서서 먹는다는 수제 파스타 집에서 맛있는 저녁을 얻어먹었다. 얻어먹으려고 간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뮌헨에 돌아와서 꼭 갚기로. 음식은오렌지빛의 질감이 투박한 그릇에 담긴 오븐에 구운 수제 뇨끼를 시켰다. 알고 주문한 건 아니고 줄 서서 1시간을 기다릴 때 종업원이 두툼한 요리 장갑을 끼고 들고 가길래 궁금해서. 라자냐라면 별로지만 뇨끼라니 안 먹을 이유가 없었다. 뇨끼는 내게 국물 없는 수제비. 맛? 두 말하면 잔소리! 뇨끼 다음 타라미수는 말해 무엇. 왜 J가 인생 티라미수라 강조했는지 이해할만했다.
저녁도 먹었겠다 바로 호텔로 돌아가긴 서운해서 밤 야경도 볼 겸 밀라노 시내를 걸었다. 달은 밝았다. 그 밤에 사람들은 왜 그리 많던지. 밀라노 두오모를 배경으로 달빛에 취하고, 광장 왼쪽에는 기타 소리와 노랫소리와 떠들썩한 박수 소리. 두오모 광장의 공기도 포근했다. 내 희망은 윤찬 공연을 보고, 환호하고, 저녁을 먹고, 와인을 마시고, 기분 좋게 취해서 밀라노 밤거리에서 버스킹 한 번 해보는 거였는데 다 물 건너 감. 뭐 그렇다는 거다. 아쉽지만 아쉽지 않으면 여행이 아니고 인생이 아니지. 아쉬운 마음은 5월 뮌헨에서 있을 조성진 공연으로 채워야겠다. 그의 헨델과 모차르트와 쇼팽으로. 언젠가는 윤찬도 오겠지. 기다림이 행복이라는 말은 맞다. 낭만적으로 밤거리를 달리는 트람도 보고, J의 안내로 문 닫기 직전 밀라노에서 그 유명하다는 로스터리 카페 스타벅스 리저브에도 들렀다. 다음날 아침엔 거기서 커피도 마셨는데 J언니들 두 분도 마음에 쏙 들어하시고.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 밀라노점(위). 밀라노 전차와 야경(가운데). 밀라노 두오모(아래).
알고 그런 건 아니지만, 내가 예약한 밀라노 호텔 건너편에는 유명한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성당도 있었다.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 성당이 왜 유명하냐면 최후의 만찬 그림이 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의 진짜 그림. 이 작품은 산타 마리아 수도원 식당에 걸려 있다고. 나는 일요일 아침 미사가 열리고 있는 성당 내부를 잠시 보았을 뿐 이 그림은 못 봤다. 예약을 못해서. 다시 밀라노를 간다면 보겠지. 일요일 오전에는 한 군데 성당을 더 보기로 했다. 암브로시아 성당. 여기도 호텔에서 멀지 않았다. 미사 중인 성당에 들어가 잠시 앉았다 나왔다. 햇살이 내리쬐는 성당 밖의 회랑도 평화로웠다. 시간이 없어서 암브로시아 미술관은 못 봤다. 다시 온다면 가 볼 곳이 또 있다. 밀라노 스포르체스코 성 미술관. 시립 미술관으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중 미완성작인 '론다니니의 피에타'가 있다고. 호텔에서 가까운 까도르나 Cadorna 메트로 역에서도 성이 보였다. 이 정도면 호텔을 고른 안목만은 신급이라 우겨도 될 만..
밀라노 두오모 광장 옆 명품 쇼핑 거리도 몇 번 걸었다. 실내 아케이드로 천장이 어마무시하게 높고 멋졌다. 첫 느낌은 도쿄의 오다이바. 밀라노에서는 고개를 자주 들고 위를 쳐다보아야 할 것 같았다. 그곳 쇼핑 사거리에 특별한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행운의 몇 바퀴 돌기. 양쪽 대각선으로 Prada 매장이 있고, 대리석 바닥에 발뒤꿈치가 들어갈 정도의 작은 홈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발꿈치를 홈에다 놓고 빙글빙글 돌았다. 한 번에 세 바퀴를 돌면서 소원을 빈다나. 쉽지는 않았다. 나는 총 세 번을 돌았다. 첫날 저녁에 한 번. 다음날 아침에 두 번. 세 번째는 남들처럼 세 바퀴를 돌았다. 세 가지는 아니고 단 하나의 소원만 가지고. 세 가지는 너무 많잖나. 제 아무리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성인이라 하더라도. 하나의 소원으로 다른 두 개는 퉁칠 수 있을 것 같다는 얄팍한 속내와 함께. 단체로 가는 여행이 쉽지는 않았지만, 두 번이나 위험을 모면할 수 있었던 건 언니들 덕분. 로컬 레스토랑을 맛보고, 생각지도 못한 소원 이벤트를 만난 건 J덕분. 혼자라면 절대로 모르고 지났을 테니. 다시 여행을 가고 싶은 의욕이 살아난 것도 좋았다. 내가 해 보고 싶은 다음 이태리 여행 테마는 단테를 찾아서.
최후의 만찬이 있는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찌에 성당(위). 명품 거리의 소원 비는 바닥(가운데). 암브로시오 성당(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