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에 첫눈이 내리고 내 가슴엔 사랑이

한국슈퍼 1

by 뮌헨의 마리
2022. 12월 눈 내린 잘츠부르크.



뮌헨에 첫눈이 내렸다.

평소라면 11월에 내렸어야 하는데. 저도 양심은 있는지 이틀을 연달아 내렸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인 채 들어서는 늦게 온 손님처럼. 그게 무슨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그러니까 체면처럼 차릴 건 차리고 방정 같은 요란은 떨지 않더라는 거지. 뭐? 아, 그러니까, 나 첫눈인데 하며 폭폭 퍼붓고 들릴 듯 말 듯 밤새도록 사르락 사르락 내려쌓이더라고. 그렇게 내린 눈은 사흘을 홀로 빛났고, 도시를 빛내고, 우리를 빛냈다.


언덕 위의 잘츠부르크 성과 설경.



첫눈 내리는 둘째 날 뮌헨의 한글학교에 갔다. 학부모 두 분을 만나러. 올해 나는 우리 반 대표를 하고 있다. 학부모 반장 말이다. 그분들과 함께 차를 마셨다. 의논할 일도 있고 해서. 한글학교에 5년이나 다니면서 우리 반 부모들과 차를 마신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설렜다. 대화는 말할 것도 없고. 엄마들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 얼굴만 알던 아이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된 기분이랄까. 이래서 사람은 직접 얼굴을 보며 얘기해야 하는구나 싶었다. 만나야 할 명분과 지분이 견우와 직녀에게만 있는 건 아니란 거지.


첫눈 오고 셋째 날엔 한글학교의 꽃인 학예제가 열렸다. 그 하루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필요한지는 아는 사람만 안다. 가을이면 토요일마다 아이들은 학예제 준비를 했다. 수업도 하고 학예제 연습도 해야 하니 선생님들은 얼마나 바쁘셨을 것인가. 학부모들도 매년 반별로 음식을 준비해서 잔칫상을 차렸는데, 올해부터 장소가 바뀌어 각자 도시락을 준비해 오기로 했다. 대신 학교 측에서는 떡을, 각반에서는 핑거 푸드와 과일과 브렛첼과 머핀과 물과 음료, 커피 등을 준비했다. 차려보니 역시 잔칫상! 학예제는 성황리에 마쳤다 한다.


나는 학예제 날 우리 반 발표까지만 보고 나왔다. 끝까지 남아 담임샘과 우리 반 학부모들과 인사라도 나누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는 사람이 없어서 어색하게 계시다 가신 분이 안 계셨길 바랄 뿐..) 내가 일하는 한국 슈퍼 사장님 딸 하나가 성탄절 콘서트 표를 선물했는데 하필이면 학예회 날과 겹쳤다. 그것도 뮌헨이 아니라 잘츠부르크에서. 눈 구경하러 간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잘츠부르크에서 눈 구경을 하고 온 셈이 되었다. 함께 일하는 J언니와 같이 갔다. 언니의 친구분도. 사방이 눈으로 뒤덮인 잘츠부르크는 얼음처럼 맑았다. 다리 위에서 바라본 잘츠부르크 성에는 눈의 여왕이 살 것 같았음. 콘서트? 나쁘진 않았다. 예수의 탄생을 그린 성탄 특집이었는데, 전날의 피로로 몇 번 필름이 끊기긴 했어도. (오래 기억될 풍경 하나도 기록해 두고자 한다. 공연 전에 잘츠부르크 시내에서 성탄 마켓을 돌아보고 언니와 들른 곳. 파란색 모짜르트 초콜렛을 파는 곳. 초록 의자와 소파가 아름다웠던 잘츠부르크의 오래된 카페. 그곳에서 커피와 카카오와 미네럴 워터를 마시던 시간 같은 것에 대해서 말이다.)



잘츠부르크 카페.



전날에 뭘 했길래? 금요일부터 오던 첫눈이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던 토요일 저녁이었다. 그날은 회식 날이었다. 독일 와서 처음 해보는 연말 회식이었다. 아니다. 직장을 관두고 처음이라고 해야 맞나. 연말이면 친구들과 송년회를 했어도 그걸 회식이라고 부르진 않으니까. 장소는 우리가 일하는 한국 슈퍼가 아니라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다른 스시 가게였다. 뮌헨에서 가장 오래된 스시 가게라 했다. 테이블은 없고, 테이크 아웃 전문 스시집이었다(가게 이름은 <김스시>). 우리는 네 명, 스시쪽 근무자는 여덟 명, 참가자는 총 11명이었다. 사장님과 사장님 딸 하나까지. 창밖엔 눈이 오고, 두 팀으로 나눠 삼겹살을 굽고, 테이블엔 따끈한 소주와 정종과 맥주. 나, 삼겹과 맥주는 안되는데. 그래도 어쩌랴. 나, 이날을 손꼽아 기다려 왔으니.


연말이라 그랬겠지. 한국에서도 연말이면 친구들과 송년회를 했고, 송년회가 끝나면 1년에 한 번 노래방을 갔다. 그래야 한 해가 마무리되는 기분이었다. 울분을 마신 해도 있었고, 촛불과 축배를 든 해도 있었다. 그렇게 묵은해를 보내야 새해가 왔다. 스트레스가 뭔가요, 그렇게 말해 무방할 연례행사였는데 그걸 독일에 와서 5년을 못하고 살다니..(뮌헨에는 노래방이 없다고 한다. 그쪽 분야에 정통해 보이는 우리 한국 식품점 수목 근무자 J에 의하면 가라오케가 있긴 한데, 노래 자막이 영어라나 뭐라나. 그게 무슨!) 스시 쪽 분들은 대체로 조용해 보였다. 우리도 일할 땐 그렇다. 그날 우리가 노는 걸 보고 사장님이 놀라신 걸 보면 평소 우리의 근무 태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연말은 무조건 회식 모드가 옳지. 일 년에 단 한 번인 회식인데.


태풍처럼 몰아친 주말을 보내고 출근한 월요일 아침. 사장님이 스시 쪽 메시지를 전달하셨다. 우리를 보고 자극을 많이 받았노라고. 내년에는 떡같이 준비해 오겠노라고. 바라던 바다. 연말 회식에 참가하는 자의 매너 아닌가. 뭐 그래서, 나? 딱 세 곡을 준비하고 갔다. 연습? 물론 했고. 노래 전에 먹고 마셔서 음이탈이 조금 난 게 옥의 티랄까. 근무 태도가 칼 같은 J언니? 노래방 조명에 최적인 야광삘의 센스 만점 의상에 주옥같은 귀걸이와 마무리는 붉은 립스틱으로 자로 잰 듯한 본보기를 보여 주심. 반듯한 이미지의 수목 근무자 J? 그날 이 분 혼자 열 일 하심. 진정한 신인 발굴이었다. 마이크가 넘어가고도 이런 분위기에 익숙지 않거나 무슨 노래를 해야 할 지 고민하는 사람이 있으면 선곡해 줘, 장단 맞춰 줘, 춤춰 줘, 노래 처음부터 끝까지 흥 돋궈 줘, 없는 탬버린이 아쉽지 않았다. 그런 반전미는 또 처음임. 우리 팀에 J언니와 J가 있었다면 스시 팀에도 반짝이는 기대주와 유망주들이 보였다. 내년에는 그분들도 소개해야지. 기대된다. 내년 연말이.. (아참, 우리 사장님과 딸 하나의 선곡도 눈 내리는 겨울밤에 어울렸다. 선곡이 궁금하시다? , 매년 중복 안 하는 걸 원칙으로 한다는 사실만 밝히기로 한다. 식상하면 안되니까. 진짜로 마지막인데, 올해는 감기 몸살로 온 Y, 함께 못 가서 많이 아쉬웠고, 내년엔 꼭 와서 한 매력 보여주길 기대함!)



잘츠부르크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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