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날들은 가고

모든 건 지나간다. 좋은 날도 나쁜 날도

by 뮌헨의 마리
물리 치료사와 병원 계단 걷기를 연습한 후 7층에서 1층까지 내려가서 찍었다. 병원의 뒤뜰과 숲.



뮌헨은 이번 주 황금의 시간을 보냈다. 날씨가 그랬다는 뜻이다. 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사흘 동안 낮 최고 기온이 최고 26-28도. 의 여름날 수준이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목소리는 경쾌하고 몸은 가벼워 보였다. 당연하지. 나도 그랬으니까. 9월부터 10월까지 이런 날들이 며칠이나 된다고. 그리고 주말엔? 바람이 불고 비도 간간이 뿌리고 낮 기온은 계단식으로 떨어질 예정이다. 토요일은 20도. 일요일은 10도. 그 후로 쭉 10월 평균 낮기온 10도 될 전망이다.



햇볕과 노느라 프루스트 읽기는 자주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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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병원은 편하다. 그중에서도 제일 편하게 느껴지는 건 뭘까? 국처럼 간병인이 없어도 된다는 것. 간호사나 간호조무사가 언제나 도와준다. 코로나 시절이 아니라서 면회도 자유롭고. 환자복을 안 입고 자기가 들고 간 옷을 입어도 되는 것도 좋다. (자복을 안 입는 이유는 바지 없이 원피스처럼 길고 뒤가 트여서다. 목 뒤쪽에만 묶을 수 있고 잘 여며지지도 않는다. 계속 복도를 걸어야 하는 내겐 불편하기 짝이 없다.) 가장 불편한 건? 와이파이가 없다. 평소 나는 2GB 정도를 데이터로 쓰는데 입원할 때 남편이 5GB로 넉넉히 용량을 늘려줬는데도 모자랐다. (다시 2GB 추가함.) 어제 하루 종일 데이터가 모자라서 브런치 글을 쓰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런치 앱이 안 열려서. 그럴 때는 뭘 하나? 휴대폰을 던져놓고 하루종일 프루스트를 읽었다. 살을 감상하느라 도가 느렸지만 상관없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권과 8권을 주말까지 읽는 게 현재의 목표다. 9권과 10권도 들고 왔지만 가능성은 글쎄다.



늦은 오후 석양이 와서 놀다 갔다.



햇살과 노느라 책 읽기는 자주 중단되었다. 늦은 오후에는 침대 맞은편 벽에 손님처럼 방문한 노을을 맞이하느라 또 한참 지연되었다. 선왕의 유령에게 복수를 맹세했으나 자꾸만 늦어지는 햄릿의 복수와는 결이 다른 지연이었다. 결기 어린 맹세나 복수가 없이도 삶은 지연될 수 있지. 이런 건 동양의 안빈낙도에 가깝다. 무위의 시간. 더 바랄 게 아무것도 없는 순간. 수민 엄마가 놓고 간 도시락을 씻고 말리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었다. 큰 보온병 2개. 작은 보온병 2개. 국그릇과 밥그릇 1개씩. 전을 담아 온 반찬통과 밥과 신선한 야채를 담았던 플라스틱 통이 총 3개. 후식으로 과일을 잘라온 통은 그날 들고 갔다. 창가에서 통들을 말리며 생각했다. 저건 그냥 통이 아니야. 저건 누군가의 마음. 씻고 말리고 볶고 끓이고 썰고 담으며 기도하듯 간절한 마음을 담았을. 모든 건 지나가지. 좋은 날도 나쁜 날도. 그러나 삶의 어느 순간에 콕 와서 박힌 저런 다정의 뿌리는 오래오래 우리 곁에 남을 것이다.



볕이 좋아서 수민 엄마가 가져온 음식 그릇과 통들을 씻어 창가에 말려두고 오래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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