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 둘의 대결이다

암과 나

by 뮌헨의 마리
주치의 방문 후 약국 아포테게 앞에서 발견한 꽃들.



퇴원 후 집에서의 수면은 조금 부족한 듯했다. 오후 5시 이전에 저녁을 먹고 나면 할 일이 없는 병원 생활과는 달리 집이란 얼마나 일이 많은 곳인가.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늦을 수밖에. 거기다 새벽에 또 잠이 깨서 프루스트에 기는데 잠은커녕 책장만 하염없이 넘어갔다. 침 6시 반에 일어나 아이의 도시락을 쌌다. 7시 반에 아이가 학교로 가고 발코니로 나가자 아침 하늘이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집에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리고도 계속 일이 보여 부엌과 욕실을 왔다 갔다 했더니 마침내 피곤해져서 침대로 돌아왔다.


퇴원 다음날 오전에는 리 동네 주치의를 찾아갔다. 독일에서 모든 통합 보고는 반드시 주치의에게 해야 한다. 병원에서 주치의 앞으로 보내는 서류를 들고 갔더니 벌써 병원으로부터 같은 내용의 이메일을 받아서 내 수술 경위를 알고 있었다. 이러면 얘기가 편하지. 병원에서 받은 두 장의 진통제 처방전에 적힌 리스트를 보여주며 주치의에게 도움을 청했다. 저걸 다 먹어야 하는지. 하나만 먹는다면 어떤 걸 언제 먹어야 하는지. 통증이 없다면 먹어도 되는 건지. 주치의는 종이에 진통제 약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가며 설명해 주고 통증이 없다면 굳이 약을 먹을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약국에 갔을 때였다. 병원에서 준 처방전에 적힌 날짜가 퇴원한 날짜보다 5일이나 빨랐다. 병원 처방전은 3일 이내에 약국에 제출해야 해서 이미 날짜가 지난 처방전이 되었다. 주치의에게 가서 다시 받아오라고 해서 또 갔다. 걷는 건 괜찮은데 속도가 느렸다. 주치의에게 새 처방전을 받아서 또 약국행. 그때였다. 약국 앞 터키 가게에서 아름다운 꽃들을 보았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암과 나. 붉은 꽃은 나고 희멀건하 푸르죽죽한 건 암라 하자. 누가 봐도 내 쪽이 생명력이 넘치지 않나, 혼잣말을 하면서. 어디서나 기선 제압이란 중요하니까. 그날 주치의는 내게 코로나 5차 접종을 권했다. 그래서 로나와 독감을 양팔에 하나씩 맞았다. 컨디션이 좋아서 맞아도 괜찮을 거 같았다. 새로 보는 젊은 여간호사가 예방접종 주사를 어찌나 살포시 하나도 안 아프게 놓는지 반했다. 이런 경험 처음이라고 고백 하고. 루가 지나자 로나 접종한 팔이 묵직한 것 빼고는 괜찮다. (고로 우리 남편은 3주 전에 코로나와 독감 접종을 동시에 맞고 2주간 고생을 했다. 코로나는 아니었는데 기침이 심했다.)



주치의에게 들렀다 오는 길에 퇴원 기념으로 밥그릇 세 개를 샀다. 멀리 모로코에서 건너왔다는 이 그릇에 아침을 담아 먹고 있다.



내 브런치를 읽고 한글학교의 어떤 분이 조심스럽게 톡을 보냈다. 토요일 아이 편으로 야채죽을 보내고 싶은데 괜찮겠냐고. 괜찮고말고! 이 얼마나 고마운 말인가. 나는 흔쾌히 그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남을 위해 내는 귀한 마음을 안 받으면 안 되지. 나 역시 오랜 고민 끝에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했을 때 상대가 고맙게 받아주면 그보다 기쁜 일이 없었다. 안 받아주면? 쓸쓸해진다. 그 사람을 생각하는 내 마음이 상대에게 가닿지 않거나 혹은 거부당한 것 같아서.


프랑스에는 스탕달과 발자크라는 두 명의 작가가 있다. 각각 <적과 흑><고리오 영감>이라는 근대 소설의 출발점이자 근대 소설의 표준인 작품을 남겼다. 둘 다 출세를 위해 파리로 상경하는 쥘리앵 소렐과 라스티냐크라는 청년들이 주인공이다. 그중 <고리오 영감>에 나오는 청년 라스티냐크가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딸들과 사위조차 오지 않는 쓸쓸한 고리오 영감의 장례식이 끝난 후 파리를 향하여 이렇게 선언하는 장면이 있다. " 이제 우리 둘의 대결이다!" 이런 거지. 배짱 좋게 출사표를 던져보는 거다. 딱 기다려 파리, 우리 맞짱 한 번 떠보자고. 퇴원을 하고 집으로 오는데 자꾸 이 대사가 각났다. 나도 한 번 그럴 때가 온 건가 싶어서. 암과 맞짱을 뜰 때가 말이다. 책하는 것까지 올리고 싶었지만 날씨도 안 받쳐주고 집에서 움직임이 많아서 퇴원 후 이틀째인데 산책을 미루고 있다. 주말부터 산책이다,라고 출사표를 던지며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허리는 빠른 속도로 낫고 있고, 이후에 방사선이 될지 항암이 될지 무엇이 오더라도 다시 씩씩하게 도전할 생각이니 걱정들 마시길!



퇴원한 다음날 아침 7시 30분. 마리아힐프 성당쪽 하늘.
이전 11화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