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원하던 날 정오 무렵 병원 정문 밖.
병원에서 마지막 날은 깊은 잠을 잤다. 전날 저녁 7시 카타리나 어머니와 통화를 하고, 남편과 아이와도 통화를 마쳤다. (힐더가드 어머니는 친구분과 여행을 떠나셔서 왓츠앱으로 간단하게 안부만 여쭈었다.) 할 일을 끝내니 내게 남은 건 프루스트를 계속 읽는 일뿐이었다. 지극한 만족감이 찾아왔다. 두 시간쯤 읽었을까. 늦은 시간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다 깜빡 잠이 드는 것처럼 책을 읽다가도 잠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당장 책을 내려놓고 눈을 감는 것이 병원에서의 내 수면법이었다. 80%는 성공한 것 같다. 이틀은 별로 못 잤는데 그 정도면 선방이니 집에 가서도 이 방법을 계속할 생각이다.
자다가 두어 번 일어나 화장실을 다녀오고 다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잠이 깬 건 새벽 다섯 시. 양치를 하고 화장실에 있던 세면도구부터 정리했다. 내 짐은 백팩 하나면 충분했다. 책과 옷과 실내화 하나. 그 이른 시간에 수민 엄마의 생강차와 아직도 따듯한 미역국을 먹었다. 집밥이라 그런지 언제 먹어도 속이 편했다. 행복한 기분으로 다시 프루스트를 만났다. 소돔과 고모라 편을 무사히 넘긴 덕분인지 진도가 술술 나갈 것 같은 느낌. 아침 일곱 시에는 병원에서 먹는 마지막 아침 식사를 했다. 독일식 건강빵이라서 겉이 딱딱했다.
퇴원하던 날 새벽의 미역국과 생강차. 병원에서 마지막 아침 식사.
퇴원하는 날 오전은 꽤 분주했다. 병원에서 받아야 할 서류가 많았다. 가게에 내야 할 진단서도 필요했고, 물리치료 처방전도 부탁했다. 활동 보조인을 3주간 보내줄 수 있다고 해서 센터로 연락을 했더니 내 경우엔 거의 가능성이 없다고 했다. 혼자 거주하는 경우에만 의료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고, 나처럼 가족이 있는 경우엔 대부분 적용받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이해가 되길래 단번에 기대를 버렸다. 집에서 먹을 진통제도 처방받았다. 몇 가지가 되는데 남편이 약국에 들르는 걸 깜빡해서 처방전에 있는 이부프로펜 600이 집에 있길래 저녁에 한 알 먹었다. 다행히 집에 와서도 통증은 없었다.
퇴원 전에 남편과 암센터도 같이 들렀다. 방사선 치료나 항암 치료 여부를 확인하려고. 마리오글루 샘이 아직 결정이 나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방사선 담당의가 마비의 위험을 언급했다고 하자 샘도 그런 위험 부담까지 감수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12월에 자연치유센터에 휴양을 가는 것은 적극 권장했다. 내 경우엔 매년 1회 3주를 신청할 자격이 된다고. 3주씩이나 갈 생각은 없고 최소 열흘 정도만 가도 면역력 회복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지난 2년 동안 가봤기 때문에 안다. 이것은 주치의 샘에게 문의해야 한다. (퇴원하고 바로 가면 좋은데 독일이 어디 그런가. 남편이 문의하니 지금 신청하면 12월에 자리가 난다고 했다.)
암센터 휴게실 발코니. 오른쪽 가운데 흰색 건물이 병원 내 자연치유센터(KfN)다.
정오쯤 집으로 왔다. 오자마자 정신없는 부엌 식탁부터 정리하고, 아이 책상 위에 어지럽게 놓인 물컵 6개를 치우고, 애완용 쥐들의 물도 갈아주고, 남편의 와이셔츠를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어떻게? 허리 대신 무릎을 구부리니 어찌어찌 되더라. 그렇게 번개같이? 아니고, 시간은 많이 걸렸다. 뭐든 천천히 해야 한다. 걷는 것도 동작도 먹는 것도. 남편과 아이의 점심은 짜파게티, 나는 어제 옛 동료 J가 준 김치볶음밥과 전을 데워먹었다. 내일부터는 뭐라도 준비해야지. 미역국과 사골국 중 뭐부터 할지 고민 중이다. 된장국도 해야지. 먹고 싶은 게 많은 걸 보니 입맛은 돌아온 것 같다.
오후에는 아이에게 세탁기 사용법을 가르쳤다. 검은 옷과 색깔이 있는 옷은 30도로 돌린다. 세제 용량과 세탁기 작동도 직접 하게 했다. 간단했다. 세탁 시간은 보통 1시간. 세탁이 끝나면 건조대에 너는 것도 같이. 가사도 다른 모든 일처럼 익숙해지면 어렵지 않다. 두어 시간을 움직였더니 피곤해져서 침대에서 쉬었다. 퇴원 전에 병원에서 몇 번 걸었기에 산책은 다음날로 미루었다. 저녁은 남편이 준비했다. 아이에겐 정수기 필터 가는 법도 가르쳤다. 아이는 엄마가 집에 온 게 좋은지 계속 싱글벙글이었다. 빨래를 널다가 피로한 기색을 보이자 빨리 침대에 누우라고 왜 무리하냐며 야단이었다. 내일부터 이분의 활약을 기대해 볼 생각이다. 드디어 집이다. 눈에 보이는 게 일이기도 하고 내버려 둔다고 누가 뭐랄 사람도 없는 내 집. 저녁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쓰레기도 버리고 청소도 도와주는 남편과 일 시키기 적당한 나이의 딸이 있는. 남편이 나 온다고 난방을 켜서 더욱 따뜻한. 병원이 아무리 편하다 한들 집보다 좋으려고.
드디어 집! 날씨도 내 맘처럼 화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