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원을 앞두고 결심

집에 가면 프루스트부터 끝내자

by 뮌헨의 마리
병실 복도 반대편 전경. 똑같은 하늘 사진만 자꾸 올리기가 뭐해서 복도를 걷다가 반대편 창문에서 찍었다. 아침엔 안개, 오후는 맑음.



병원에서 보내는 마지막 이틀을 알차게 보내야겠다고 한 다짐은 그럭저럭 만족할 만하다. 월요일에 병원 복도를 걷다가 물리 치료사를 만났다. 이번주도 오냐고 했더니 글쎄 안 온다지 뭔가. 왜냐고 물었더니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거였다. 더 가르칠 게 없으니 하산하란 소리로 들렸다. 그건 아닌데. 아쉬워하는 내 표정을 보고 그녀가 물었다. 혹시 궁금한 게 있냐고. 난 허리가 괜찮아지면 하라던 그 세 가지 동작을 한 번 더 보여달라고 했다. 물리 치료사가 복도에서 세 가지 동작을 보여주고 내가 따라 했다. 맨손으로 해도 되고 고무 밴드를 활용해도 된다고. 든 동작은 호흡과 함께 느리게 10회씩 반복할 것.


1. 팔꿈치를 겨드랑이에 붙이고 양팔을 앞으로 뻗고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팔을 천천히 뒤로 밀기. 2. 팔꿈치를 겨드랑이에 붙이고 양팔을 밑으로 뻗고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천천히 뒤로 당기기(노젓기) 3. 양팔을 위로 들고 손바닥을 펴고 천천히 아래로 당기기.


세 번째 수술 후 침내 결심했다. 죽어도 아프지 말자? 다시는 아프지 말자? 그런 건 아니고. 아프고 안 아프고 가 내 뜻대로 되나. 아프더라도 절망하지 말자. 아프더라도 희망을 놓지 말자. 좀 뻔하긴 하지만 그 정도. 인명은 재천이다. 사람이 나고 가는 것은 하늘에 달린 일. 이 사실을 잊지 말자는 거지. 살고 싶다고 살고, 죽고 싶다고 죽을 수 사람은 지 않으니까. 이 일은 내 손을 떠난 일. 다만 세 번씩이나 수술을 하고도 멀쩡히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일이다. 래도, 그래도 말이다. 세 번씩이나 수술을 했으니 뭔가 그럴싸한 결심 나 정도는 징적으로 해줘야 될 거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다시는 오지 말자, 수술실. 이번으로 수술과는 작별을 고하자. 대로 잘 될지는 몰라도 뭐 일단 결심 해 볼 수 있는 거니까.



수민 엄마의 세 번째 밥상과 생강레몬꿀차. 수민 엄마가 말했다. 음식이 약이라고. 진짜 약을 먹는 것 같았다. 꿀맛이었다.



딸아이는 월요일 오후 늦게 잠깐 코빼기를 비고 갔다. 우리 집 옆 마리아힐프 광장에서 아우둘트 Audult 연례 전통시장이 열리고 있는데 오후에 친구 율리안나와 둘이서 다녀왔다고 한다. 거기서 맛있는 걸 하도 많이 사 먹어서 저녁 못 먹겠다고 했다. 1주일 전에는 병원만 오면 엄마 품에 안겨 눈물 바람을 하더니 그사이 많이 컸다. 소처럼 밝고 씩씩해졌다. 인이 그런 변화를 못 알아챈다는 게 포인트다. 파파가 또 출장을 가서 이틀밤을 혼자 자고 일어나고 챙겨 먹고 도시락 준비해 가야 하는데 (아마도 빵을 사 가는 것 같다.) 이 모든 걸 혼자서도 척척 잘 해내고 있다. 집에 가면 엄마도 잘 도와주겠지? 엄마는 써부터 김칫국 마시고 있다.


마지막 날까지 원에 다녀간 이들이 있다. 이른 아침 수민 엄마가 세 번째로 다녀갔다. 끈한 미역국을 끓여서. 출근도 해야 하는 사람이 그럴 정신과 시간이 어디 있다고. 저 정성에 낫지 않을 도리가 없다. 수민 엄마 앞에서는 거절 같은 게 안 한다. 알아서 말없이 척척 챙겨주는 그녀에겐 빨리 쾌유하는 걸로 갚아야겠다. 현재 동료 Y와 옛 동료 J도 오전 오후로 나눠 다녀갔다. 두 사람 다 하루 전날 연락이 와서 뭘 먹고 싶냐고 묻길래 Y에게는 과일을, J에게는 김치볶음밥을 부탁했다. 왜 김치볶음밥? 글쎄, 갑자기 먹고 싶어서. 나도 참 복이 많다. 수많은 사람들의 염려와 기도와 정성으로 멀쩡하게 집으로 가구나. 한국의 가족들과 친구들과 지인들의 마음도 넘치도록 받고 있다. 감사하고 감사할 뿐이다.



현재 동료 Y가 들고 온 정성스런 과일. 옛 동료 J가 들고 온 음식 바구니엔 고구마, 옥수수, 전과 김치볶음밥!



길고 지루한 입원 생활을 견디게 해 준 일등 공신이 또 있다. 바로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권과 8권(소돔과 고모라 편)을 요일 아침에 겨우 끝냈다. 프루스트는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이토록 세밀하면서 이토록 길고도 지루하게. 정말 존경스럽다. 이러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프루스트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 같다. 세계 문학사에서 난해한 글이라면 모더니즘 아니겠나. 표 주자로는 국의 <율리시스>를 쓴 임스 이스와 미국의 <소리와 분노>의 작가 윌리엄 포크너겠다. 마디로 자신을 고문하고 싶을 때 기 안성맞춤인 책라 할까. 그런데 정공법으로 그들과 맞짱을 뜨고도 남을 사람이 프루스트 같다. 용은 두 작가처럼 난해하지 않지만 한 가지 사물이나 감정에 대해 사막의 낙타 행렬처럼 끝없는 비유와 장황 수사는 쉽게 잠을 른다는 게 유일한 단점이다. 아름다운 구절 또한 많고도 많지만.


수술은 끝났어도 내게 프루스트는 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9권부터 13권까지 아직 다섯 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프루스트를 무사히 끝낼 수 있을까. 세 번째 수술의 결심이 프루스트라는 엉뚱하게 삼천포로 빠 듯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20세기 최고의 책이자 51세로 눈을 감은 작가가 38세에 집필을 시작해서 죽기 직전까지 13년을 다듬은 역작을 읽기 위해 나처럼 아플 때까지 기다리실 필요는 없겠다. 12일간의 입원을 끝내고 도하지는 않았지만 수술 후 글쓰기와 책 읽기라는 두 마리 토끼지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소감은 뿌듯하다. 9권(갇힌 여인 편)을 펼치자 주인공의 여자 친구 베르틴이 나의 귀가에 축복의 노래를 불러 주었다


"고통은 미친 짓이야.

고통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더 미친 사람이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8/9/10권과 수민 엄마의 호박죽.



PS. 제일 중요한 걸 깜빡했다. 독일 병원이 왜 좋은지. 정답은 무료라는 것. 총 12일 동안 수술하고 치료받고 먹고 잤는데 공짜. (3일은 3인실/9일은 1인실.) 삼시 세끼 포함. (이거 실화인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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