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 걷기에 안성맞춤인 나만의 성지를. 그것도 이자르강 바로 옆에. 첫 맨발 걷기 장소는 아니다. 첫날 맨날 걷기를하고 다음날 그곳을 찾으러 산책을 나섰다가 우연히 발견한 장소였다. 둘째 날은 처음부터 이자르 강변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아침부터 햇살이 부챗살처럼 온화하게 퍼진 날이었다. 어영부영하다 아침 시간이 다 지나갈까 봐 오전 10시에 집을 나섰다. 집이 이자르 강에서 5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 산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공기는 맑고 하늘은 푸르고 햇살은 부드럽고 산책길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산책길에서 자전거 도로를 지나 곧바로 이자르 강변길로 들어섰다. 전날만큼은 아니지만 그날도 바람이 꽤 불었다. 강변인데 당연하지. 바람 잘 날을 바라는 게 무리일테니 예사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첫 번째 다리를 지났다. 이 다리를 지나면 로젠 가르텐이 나온다. 계속 가면 이번엔 철로가 나오고. 철로를 지나면 로젠 가르텐을 막 지났다는 뜻이다. 철로는 말 그대로 철로. 다리는 아니다. S반과 기차만 지난다. 세 번째 다리는 이자 필하모니로 연결된다. 바로 그때였다. 세 번째 다리가 나오기 전이고, 전날 맨발 걷기를 했던 곳에도 훨씬 못 미치는 장소였다. 전날 간 곳은 세 번째 다리를 지나고도 한참을 더 가야 하니까새 장소는 우리 집에서도 더 가깝다는 뜻이다. 그곳은 강변 산책로와 강과 큰 버드나무 옆에 있었다. 버드나무는 아주 컸고 그 옆에 새로운 맨발 걷기의 성지가 있었다. 고운 모래와 함께. 약간 높은 곳에는 통나무가 의자처럼 길게 누워 있었다.보자마자 마음에 들었다. 어떻게 지금까지 이곳을 몰랐을까 신기할 정도.
새로 찾은 맨발 걷기 장소. 고운 모래가 깔려 있고, 앞에는 이자르 강. 오른쪽엔 버드나무 한 그루.
전날 맨발 걷기를 했던 곳은 평지에다 앉을 곳이 없어서 신발과 양말을 벗거나 신을 때도 서서 해야 했는데 새로 찾은 장소에는 앉아서 쉴 수 있는 긴 통나무가 벤치 역할을 했다. 해가 잘 드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마치 작은 모래 놀이터 같았다. 거기서 버드나무까지도 모랫길로 연결되어 있었다. 오래된 나무토막이나 크고 작은 돌멩이들 몇 개, 잔뿌리들이 다였다. 다행히 유리 조각이나 개똥은 없었다. 모래가 가늘고 고와서 맨발에 포근하게 감겼다. 아침부터 해가 나와서인지 모래 위를 걸어도 차가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배낭도 내려놓았다. 전날과 비교해서 산책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개도 많았고. 안 부끄럽냐고? 혼자서? 바람에 머리까지 산발한 동양 여자가? 전혀. 그런 건 개의치 않은 지 오래다. 독일 사람들 역시 남의 일에 신경 쓰지 않는다. 돌아오는 길에는 그 날씨에도 수영복 차림으로 이자르 강에 들어갔다 나오는 젊은 독일 여성 셋을 발견했을 정도니까. 그러니 나 정도야 해가 좋다고 해바라기 하며 모래 위를 놀듯 걷는구나 하겠지. 독일 생활이 처음이었으면 엄두도 못 냈겠지만.
그곳에서 무려 세 시간을 놀았다. 집에 오니 오후 두 시 반. 그동안 모래밭에서 뭘 했냐고? 딱히 한 일은 많지 않다. 윗부분이 따뜻해진 모래 위를 천천히 걷기. 걷다가 울퉁불퉁 표면이 고르지 못한 곳은 발바닥으로 문지르며 평평하게 고르기. 나무토막이나 돌멩이나 잔가지가 보이면 발가락으로 집어서 모래 밖으로 던지기. 잔뿌리가 보이면 무릎을 최대한 낮추고 허리를 굽혀 손으로 뽑기도 했다.(이제 그 청도는 할 수 있다.) 가만히 서서 해를 쬐기도 하고 긴 통나무 의자에 앉아 쉬기도 했다. 간혹 모래밭으로 뛰어드는 개들이나 개 주인들에게 눈으로 인사도 나누고. 그리고도 시간이 남아 오십 보도 떨어지지 않은 버드나무까지 새 길을 냈다. 바닥에 가득한 나뭇잎들을 발바닥으로 쓸어내고, 크고 작은 단단한 뿌리들은 조심하면서. 뿌리가 뾰족해서 발바닥에 찔릴 만한 곳에는 하얀 조약돌을 하나씩 놓아두었다. 저긴 조심하라는 나름의 표지로.버드나무 가지의 잎들이 지나갈 때마다 내 얼굴과 목을 간지럽혔다.나뭇잎들도 심심했구나. 독일에서 낯익은 고향의 나무를 보는 일은 반가운 옛 친구를 만나는 것과 같다.
앞으로 얼마나 자주 혹은 몇 번을 더 여기로 와서 맨발 걷기를 할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른다. 뮌헨의 가을은 짧고, 11월은 벌써 코 앞에 와 있다. 11월은 독일 사람들에게 우울한 달이다. 봄이 오는 부활절까지 다섯 달을 긴 겨울과 함께살아야 하기 때문. 해를 그리고 봄을 기다리며. 그럼에도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이 겨울만 잘 버티면 봄이 오고, 봄이 오면 더 자주 맨발 걷기를 할 수 있겠지. 맨발 걷기를 하면 내 몸과 마음도 더욱 건강해지고 편안해질 것이고. 맨발 걷기 성지 옆에는 변함 없이 이자르 강이 흐르고, 날이 조금 더 따뜻해지면 물속에 발을 담글 날도 오겠지.그때는 길고 힘든 항암도 끝나 있을 테고. 여기까지만 생각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이 모든 것을 감안하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봄이 오면 모든 일이 원만하고 순조로워질 것 같다. 날씨에 구애없이. 관건은 역시 11월의 항암. 희망이 있으니 견디기도 조금은 쉽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