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추뼈 전이로 허리 수술을 하고 퇴원한 지 열흘. 이자르강 산책을 나왔다. 집에 오니 할 일이 많아 체력이 잘 비축되지 않는다. 집안에서 움직이는 것만으로 쉽게 지쳐서 산책을 나와도 30분 이상 걷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그날은 산책을 무려 2시간 반을 다녀왔다. 이유는 갑자기 해가 나면서 청명해진 날씨와 맨발 걷기 때문이었다. 비가 와서 공기도 기분도 차분한 오전이었다. 이른 시간은 쌀쌀해서 오전 11시에 집을 나섰다.산책길에 사람은 없었다. 평소라면 걷거나 뛰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많은 곳인데. 산책길에는 노란 단풍들, 갈색의 잎들이 발에 차였다. 한 번씩 소리 내어 지나며 우수수 잎들을 떨구게 하는 바람도 심심하지 않아서 좋았다.
처음엔 천천히 걸어도 30분이면 충분한 로젠 가르텐까지만 갔다 올 생각이었다. 왕복 1시간이면 체력적으로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걷다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허리 수술 부위는 거의 나았고, 걸을 때마다 삐걱이던 등 근육도 많이 부드러워졌다. 그날따라 몸도 마음도 발걸음도 가벼워서 내친김에 뮌헨 동물원까지 걸어보자 싶었다. 그 무렵 해가 나서 산책길 사방이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약이라도 먹은 듯 의지가 충만해졌다. 건강할 때도 왕복 1시간 반이 걸리던 동물원뿐만 아니라 뮌헨의 남쪽 끝인 그륀발트까지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숲이 우거진 산책길 오른편으로는 자전거 도로. 그 옆엔 개와 산책할 수 있는 잔디밭. 그 옆은 이자르 강을 따라 걷는 이자르 강변 산책로였다. 강변 산책로에는 해가 눈부시게 비췄고, 산책하는 사람들 수도 늘어났다. 뮌헨 사람들이 누군가. 해가 나오는 찬스를 놓칠 사람들이 아니다. 나도 햇살을 맞으며 그 길을 걸어보고 싶었다. 집을 나선 지 1시간. 동물원을 100m 정도 앞둔 곳이었다. 산책길 오른쪽 이자르 강변으로 난 좁은 길을 내려갈 때였다. 강변로앞에 부드러운 모래밭이 보였다. 폭과 길이는 2-3 미터 정도. 해가 정면으로 내리쬐는 곳이었다. 오, 여기서 양말을 벗고 조금 걷거나 서 있어볼까 싶었다.
첫 맨발 걷기. 사진의 왼쪽 끝이 이자르 강이다.
비 온 뒤라 젖은 모래는 차가웠다. 막 나오기 시작한 해도 발에 온기를 주기는 역부족. 그래도 먹구름이 해를 가리지만 않아도 단단히 옷깃을 여미면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문제는 바람이었다. 강가라 바람이 셌다. 30분을 걷다가 서다가 했다. 고운 모래라 발바닥도 아프지 않았다. 개똥도 없고, 돌멩이나 유리 조각도 없었다. 발은 차가웠지만 반 시간 동만 접지 Earthing를 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분명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때였다. 몸이 추워지기 전에 발에 묻은 모래를 털고 보온 양말을 신고 다시 산책을 시작하려는데나무 한 그루가 강렬하게 내 시선을 끌었다. 처음 든 생각은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나무!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으로 중생들의 고통을 어루만져 준다는 부처. 나무 한 그루가 그 부처님으로 보였다. 불현듯돌아가신 우리 스님이 생각났다. 스님께서 천 개의 손을 가진 나무 보살로 화현 하셔서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셨구나.더 이상 집안에만 머물지 말고 다시 산책을 나오라고. 용기를 내어 맨발로도 걸어보라고.
돌아오는 길은 강변로를 따라 걸었다. 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왔지만 내 등을 따스하게 데우는 햇살이 있어 크게 춥지는 않았다. 추운 게 뭔가. 이렇게 나를 지켜주시는 우리 스님이 계신데 두려울 게 뭔가. 항암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른 저녁을 먹고 발코니에 나갔더니 초저녁 하늘에 밝고 큰 별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스님 별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스님을 잊지 않는 한 스님도 나를 언제까지나 지켜주실 거라 믿는다. 믿음보다 큰 덕목은 없다. 그렇게 믿으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 나는 다시 건강해질 것이고, 내가 받은 이 도움을 다시 누군가에게 갚으며 살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은 맨발 걷기 덕분인지 긴 산책 덕분인지 바람에 이리저리 떠밀리느라 체력이 고갈된 탓이었는지 초저녁에 깊은 잠이 들었다. 밤새 내 잠 속에도 맑은 별 하나가 떠 있었을 것이다.